홍두희 원장 ㅣ 수원 센트럴요양병원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아빠, 뇌를 버려!

운전 중에 뒷자석에 있던 아이가 필자에게 외쳤다. 가족 나들이 중 차량 정체가 심해지고, 네비게이션마저 최소시간 경로에서 갈팡질팡할 때 필자는 여지없이 네비게이션의 지도를 이리 저리 살펴본다. 샛길이 있지 않을까? 혹시 이 길로 가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하지만 이 길을 가봐도 저 길을 가봐도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 시간은 네비게이션이 예상한 시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네비게이션을 불신하고 운전해 얻은 것이라고는 좁고 낯선 길에서 불편하게 운전하며 얻은 긴장감과 피로감, 그리고 다시는 그 길로 진입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 정도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아이가 내게 말한 것이다. 네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라고. 

우리 병원에는 병원 생활이 수 년이 넘은 분들도 많다. 그 정도 되면 반 의사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본인이 이런 증상을 보이면 무슨 약을 먹어야 한다고 약 이름을 정확하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약 대신 다른 회사 약을 쓴다고 하면 그건 효과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경우도 있으니 가끔은 경험이 주는 학습 효과에 놀랍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 일부는 약에 대해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갖고, 의사의 처방에 대입하면서 효과를 미리 속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A 환자는 65세의 나이에 병원 생활이 10년차다. 척수 손상으로 팔 일부를 움직이고, 다리는 아예 움직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얼마나 답답할까 싶은 상황이지만 본인은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있어 괜찮다고 한다.

이 분 특징이 “나는 설사하면 스멕타는 안 듣고, 로페라마이드만 들으니 그걸 처방해 줘” 식의 약 주문(?)을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큰 문제 아니라면 대개는 환자들 원하는 대로 해 주는 편인데 이 분은 장마비가 있는 편인데, 한편으로는 무른 변이 자주 있어 장 운동을 떨어뜨리는 약은 좋지 않다. 그런데도 자꾸 장 운동을 떨어뜨리는 로페라마이드만 찾으려 하여 장마비가 해결이 안 되었다. 
 

하루는 같은 방 다른 환자랑 대화하면서 몰래 진통제를 줄였는데 어떠신가 물었다.

그 환자분은 진통제를 줄인지도 몰랐다면서 몇 년이나 먹은 약인데 어떻게 약 안 먹어도 안 아프냐고, 본인은 진통제를 평생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였고, 필자는 진통제는 안아프려고 먹는거니 지금 안아프시면 된거다. 좋은 약 많으니 나중에 아프면 안 아프게 해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애가 하던 말을 가져와서,

“요즘은 복잡한 세상에 뇌를 버리고 살면 편하대요. 약 일일이 확인하지 말고 그냥 불편한거 말씀하시면 제가 알아서 조절해 드릴께요. 저 믿으시죠?”

라고 하였더니 피식 웃으며 믿슙니다 하고 받아치셨다. . 이 얘기를 옆에서 듣던 A 환자가 말했다. “뇌를 버려? 어떻게 뇌를 버려? 무슨 그런 말이 있어.” 하면서 뭔가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필자는 “초등학생 우리 애가 하는 말이에요. 요즘 애들 표현도 참 신기하죠?” 라고 하고 더 이상 얘기는 안 하였다. 

며칠 뒤, A 환자가 필자에게 물었다.

“나도 뇌를 버릴까?

약이 하도 많아서 약만 먹어도 배부른데, 저이는 약 줄고도 안아프고 괜찮대서. 내 약은 한움큼인데, 저이 약은 어느새 반으로 줄었어.” 필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한번 버려보세요. 무슨 약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저 믿고 그냥 드시고, 불편한거 말씀하시면 알아서 해드릴께요.”

까다롭던 A 환자의 약은 20가지가 넘었다가 지금은 15개 정도로 줄었다. 물론 무슨 약을 줄이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도 검색해 보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별 말 없으신 것 보니 지낼 만 한가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복잡한 세상, 뇌를 버리고 편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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