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다롄 _ 뤼순형무소,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김예채 컬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어른들을 위한 월간 인문학학습지 ‘한걸음’ 집필진

▲ 여순 관동법원
▲ 여순 관동법원

중국 다롄 공항에 내려 약 한 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하면 뤼순이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이 지역에는 조선의 아픈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먼저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이동했는데요.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송치되어 재판을 받은 곳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법정은 건물 2층에 있어요. 그 때의 모습과 똑같이 복원해 놓은 재판장은 공기부터 차가웠습니다. 

재판 변론 중 안중근 의사는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 하랴.”라며 일본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재판의 부당함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자리에서 사형 선고가 내려졌죠. 

▲ 여순감옥 안중근 의사 흉상
▲ 여순감옥 안중근 의사 흉상

저는 안중근 의사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보고 싶었지만, 왠지 함부로 앉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조심스러움이 생겼습니다. 그가 앉았던 의자에도 그의 숨결이, 결연했던 다짐이 묻어있는 것만 같았죠. 괜히 의자 주변을 맴돌아도 보고, 맨 뒤에 서서 앞을 바라보기도 하고, 방청석에 앉아 한참을 그 차가운 공기에 적응한 후에야 저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그 의자에 앉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내 마음에 물었죠. 너는 이 의자에 앉을 용기가 있냐고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던 그 짧은 순간, 부끄러움에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 여순감옥 내부 전경
▲ 여순감옥 내부 전경

법원에서 나와 뤼순 형무소로 향했습니다. 뤼순 형무소는 러일전쟁 후 다롄 지역을 차지한 일본이 러시아가 만들어 놨던 감옥을 확장해서 지은 형무소입니다.

일본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서 말이죠.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선생님도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옥사했습니다. 뤼순 형무소는 감방이 275개나 있어 2천여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해요. 형무소 안의 규모가 굉장히 크고 건물도 여러 개라 전체를 돌아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요. 형무소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의 높이는 4미터나 되어 높은 담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왔습니다. 한국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와 크기만 다를 뿐 너무 같은 구조와 모습이라 더 섬뜩했고요. 

자리를 옮겨 감방이 좌우로 죽 이어진 긴 복도에 들어섰습니다. 잔인하고 혹독한 고문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내부의 싸늘한 공기가 손 끝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어요.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이곳에서 흘러나왔던 비명소리가 선명히 제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고, 떨어진 핏자국이 보이는 것 같았죠. 

▲ 여순감옥 고문실
▲ 여순감옥 고문실

뤼순 형무소에는 조금 특별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국제 항일열사 전시관’인데요. 이곳에서 순국하신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최홍식 등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사료와 흉상을 전시해 놓은 곳입니다.

한 분 한 분의 업적을 찬찬히 살폈는데, 그중에 제일 마음에 오래 머물렀던 이회영 선생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 여순감옥 우당 이회영 선생 소개
▲ 여순감옥 우당 이회영 선생 소개

우당 이회영 선생님은 조선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여섯 형제와 함께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이때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 6천 석(현재로 환산하면 약 600억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으며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셨죠. 그 당시 경기도 양주와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이 거의 다 우당 이회영 일가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이회영 선생님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다소 격렬한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청산리 전투를 이끈 무관들을 길러냈으며 중국 투사들과 함께 항일 구국연맹을 조직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 등을 주도했죠. 
이회영 선생님이 일제에 붙잡힌 것은 그의 나이 65세, 1932년 11월이었습니다. 만주에 있는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도착한 다롄 항구에서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체포된 것이죠. 다롄에 도착했을 당시, 이회영 선생님은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 부은 탓에 제대로 먹지 못해 기력이 쇠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이를 실행했던 것이죠. 아버지가 걱정되었던 아들이 이를 말렸을 때에 이회영 선생님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는 젊고 미래가 창창한데 내가 살면 얼마나 살 수 있겠니. 너희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남겠다." 결국 이회영 선생은 이 말을 남기고 영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32년 11월, 당시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가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배에서 나리자 경찰에 잡혀서 취조 중, 류치장 창살에 목매 죽은 리상한 로인.’

이 기사는 바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일본 경찰이 사실을 은폐하고, 소문은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선생의 죽음은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유치장 안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는 발표는 거짓말이었고, 노인의 몸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몸서리 처지는 고문을 받다 숨진 것이었죠. 일제는 서둘러 화장까지 하고 선생의 죽음을 숨기려 했습니다. 

▲ 여순감옥 전경
▲ 여순감옥 전경

 

이회영 선생님은 왜 자신의 재산을 다 바쳐서 독립운동을 했을까? 그 많던 재산은 독립운동 하는 데 다 쓰고, 가족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그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들이 일본군을 피해 도망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도, 형제들이 일본군에 잡혀가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왜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이 먹먹해 졌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자신의 안위와 행복보다 국가의 안위와 독립을 택했던 것이죠. 그리고 죽음까지도 편한 길이 아닌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현재 나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각자도생하기도 벅찬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기는커녕 손해 보는 일은 일단 피하려 애쓰죠. 누군가가 희생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금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희생이란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 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기꺼이 다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지금 일시적인 명예, 일시적인 가치, 일시적은 인기, 일시적인 칭찬 등 순간의 가치를 위해서 영원의 가치를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곱씹어 보았습니다. 역사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 순간의 쾌락과 안정과 인정을 내려놓는 희생정신이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정말 무엇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나 자신을 더 깊게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형무소의 작은 창문으로 유난히 밝게 비춰오는 빛이, 제게 강렬하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기백과 의지, 용기와 단단한 마음을 닮고 싶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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