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채 컬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어른들을 위한 월간 인문학학습지 ‘한걸음’ 집필진

▲ 아르바트 거리
▲ 아르바트 거리

코로나로 해외에 나가지 못한 채 벌써 1년 6개월이 되어갑니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랜선으로나마 제가 다니는 조금은 색다르고 약간은 특별한 여행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많이 여행하는 곳 속에 숨어있는 역사유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주로 다닙니다. 쉼이나 힐링을 위한 여행 사이에 가치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곳을 들러보는 것이 좋더라고요. 

또 우리나라가 아닌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유적지를 방문할 때면 깊숙이 숨겨 놓았던 애국심이 샘솟는다고 해야 할까요? 나의 나라, 우리의 역사를 잘 기억하고 알려야겠다고 다짐하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곳은 아시아의 유럽이라 불리는 곳인데요. 바로 블라디보스톡입니다. 위치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한국, 중국, 일본 여행객들이 쉽게 방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블라디보스톡에는 아주 유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여행객이라면 꼭 들리는 장소이기도 하고, 번화가라 불리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치지 않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아르바트 거리인데요. 이 거리가 해외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독립운동 유적지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더욱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아르바트거리의 옛 이름은 고려인거리 혹은 개척리였습니다. 한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추운 이곳으로 이주했고 처음으로 자리를 잡고 살아가게 된 곳이죠. 연해주로 첫 이주를 시작한 건 1863년인데, 블라디보스톡 아르바트거리에 살기 시작한 건 1874년부터에요. 아르바트거리를 따라 쭉 걸어가면 해양공원이 나오는데 이 해안가로부터 300m가 전부 다 개척리였다고 합니다. 아주 넓은 공간이었고 그만큼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살았던 거죠. 
 

▲ 최재형 집터
▲ 최재형 집터

이 거리에 “최재형 거주 집” 터가 남아있습니다. 아주 유명하고 맛있는 팬케이크 가게와 가까운 곳에 있는데, 아르바트 메인거리의 건물에 표지석만 작게 붙어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저도 그 주변에 가까워 졌을 때에는 한 건물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천천히 걸으며 표지석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살피며 다녔어요. 

최재형 선생님은 연해주 지역 항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 울 만큼 유명한 분이에요. 그 시절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대부분이 부유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많은 양의 자금이 필요했죠. 

최재형 선생님은 이 연해주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셨어요. 최재형 선생님께서 이 아르바트거리의 중심지에 사셨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재력을 가지고 계셨는지 알 수 있었어요. 이 장소에서 이 거리를 오가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도왔을 최재형 선생님을 생각하니 내가 서 있는 곳이 역사의 굵은 흔적이 남은 장소라 느껴져 더 의미 있고 가슴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개척리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 신채호, 이상설, 안중근, 장지연, 이강, 이위종, 홍범도, 윤인석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무대이기도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이 넓은 아르바트거리를 거닐며 독립을 위해 일하고 독립을 꿈 꿨을거라 생각하니 관광지가 아닌 우리나라 독립운동사가 시작된 역사의 첫 번째 길로 보이기 시작했어요. 

아르바트 거리에는 우리가 잘 아는 해조신문사도 있었습니다. 해조신문은 해외에서 우리말로 발행된 최초의 일간신문입니다. 1908년 2월에 창간했는데요.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해 항일애국 논설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창간 3개월만인 5월에 7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게 됩니다. 

또 대동공보도 있었습니다. 이 신문은 해조신문의 폐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8년 11월에 창간하게 되는데요. 이번에는 발행인을 한인이 아닌 러시아의 변호사 미하일로프로 하여 일주일에 2회 발간했습니다. 이 당시 연해주에는 한인들의 수가 4만 5천명을 넘었다고 해요. 

대동공보 역시 한글로 만들어졌고 연해주는 물론이며 국내뿐만 아니라 상해, 미주, 하와이, 멕시코까지 발송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대동공보사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의거 할 모의가 극비리에 이루어 진 곳이 대동공보거든요. 

이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대동공보가 지원하기도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1910년, 대동공보의 재정난이 더욱 심해지게 되자 대동공보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앞서 잠시 들렀던 ‘최재형 거주집’의 인물, 최재형 선생님께서 거금을 내놓고 사장에 취임하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농간으로 1910년 9월에 러시아 총독의 명령에 따라 폐간됩니다.  

해조신문사와 대동공보 모두 기록상 주소지를 근거로 대략의 위치만 알 수 있었어요. 정확한 표지석이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지키며 고군분투하고 걸었던 그 거리를 역사를 더듬으며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요동쳤습니다. 
 

▲ 서울거리 표지판
▲ 서울거리 표지판

그 외에도 한인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해주는 서울거리가 있습니다. 아직도 그 곳의 이름은 서울거리로 불리고 있으며 푯말도 남아있습니다. 신한촌 기념탑 등이 아르바트거리 주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제 블라디보스톡 여행을 다녀온 지인들이 많았는데 이 거리를 지나갔는데도 “최재형 거주 집”의 표지석을 못 봤다는 친구들이 꽤 많았습니다. 뭐든지 관심이 있어야 눈에 들어오듯이 역사는 현재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고 함께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지날 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또 여행 할 때 마다 한 두 곳이라도 역사 유적지를 찾아다니다 보면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찾아보고 한 곳이라도 탐방하게 되는데, 역사도 천천히 내 삶에 스며드는 데까지 자연스러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여행을 하는 동안 블라디보스톡은 정말 추웠어요. 11월인데 이미 한 차례 내린 폭설로 인해 땅은 얼어있었고, 곳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었죠. 다른 사람들보다 추위를 더 많이 타는 저는 롱패딩과 핫팩으로도 추위를 참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아르바트 거리를 걷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서 나라를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어 이 추운 땅으로 이주했을까 라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백범일지에 나온 이야기 중 하나인데 김구선생님께서 임시정부가 시작 될 때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김구로 바꾼 연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독립이 될까를 생각해봤더니 2천만 동포가 김구가 되면, 모든 평범한 사람이 자신처럼 김구가 되면 독립이 올 것이라고요. 그 진심이 통하여 김구 선생님께서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되셨다고 해요.  

김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2천만 민중이 함께 독립을 하겠다는 자각과 실천을 위해, 조선의 백성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도록 하기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2천만 동포를 한 번에 움직일 수는 없지만 나 한사람부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되리라 라는 생각이었겠지요. 그리하여 이 추운 땅에서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무궁화를 피웠던 것 아닐까요? 

누군가는 주필이 되고, 누군가는 무장독립군이 되고, 누군가는 학교를 세우고, 누군가는 자금조달을 하면서 말이죠. 비록 피우지 못할 지라도 심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독립운동, 그리고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추운 땅에서 기어이 피워 낸 무궁화 한 송이. 많은 분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심기워진 그 때의 무궁화들이 모여 지금의 대한민국이, 지금의 우리가 여기 서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무궁화를 피우고 있는지,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질문이 불쑥 저를 뒤흔들어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홧홧 거리던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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