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자싱2 _ 김구 피난처

김예채 칼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유튜브 '역사투어하는 여자' 채널 운영중

▲ 김구선생 피난처 @김예채 칼럼니스트
▲ 김구선생 피난처 @김예채 칼럼니스트

자싱의 넓은 길 양옆으로 다소 고풍스러운 중국식 건물이 이어지는 거리에 김구 선생의 피난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때 이른 매화가 피어 덕분에 거리에 꽃향기가 진동했죠. 고즈넉한 거리에 핀 매화 아래서 한참 사진을 찍고 천천히 정취를 느끼며 거리를 걸었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김구피난처라 쓰인 건물 앞에 다다랐어요. 

김구 선생이 머물렀다는 2층 침실은 입구가 옷장으로 위장되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한참 헤맸을 만큼 집 구조가 복잡했죠. 혹여나 일본군들이 이곳까지 김구선생님을 찾으러 온다면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이런 곳을 피난처로 골랐다고 합니다. 저도 한참을 헤매다 옷장 문을 열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선생님의 침실을 만났습니다.

▲ 김구선생 피난처의 창문 @김예채 칼럼니스트
▲ 김구선생 피난처의 창문 @김예채 칼럼니스트

방의 벽면 세 곳에는 작은 창을 만들어 어느 방향에서든 누가 오는지 볼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한쪽 구석에는 긴급한 상황에 사다리를 내려 피신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탈출비상구도 만들어 놓았고요. 비상구 아래로 내려가면 나룻배가 항상 준비되어 있었고, 그 배를 타고 쉽게 피신할 수 있었죠. 실제 김구 선생님은 처녀 뱃사공 주애보의 도움으로 남호로 피신한 적이 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주애보와 위장결혼을 하고 실제 부부처럼 지내셨고요. 

제가 느끼기에 김구 선생님의 피난처가 있는 곳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나룻배가 있던 곳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큰 호수와 푸르른 나무들이 한 눈에 들어와 산뜻하기까지 했죠. 고즈넉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차분한 거리의 모습은 제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김구 선생님 역시 일본에 쫓기는 상황이었지만 이곳에서 잠시나마 긴장과 고뇌를 잊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김구 선생님은 자신이 언제 일본에 잡히고, 언제 목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의연하고 담담했을지언정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매일 마음 졸이며 국가의 안위를 생각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 김구선생 피난처의 나룻배와 표지석 @김예채 칼럼니스트
▲ 김구선생 피난처의 나룻배와 표지석 @김예채 칼럼니스트

 

한국에서 중국으로 탐장을 오기 전에는 솔직히 이 많은 역사 유적지가 먼 나라 이야기인 듯 깊게 와 닿지도, 실감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인물에 대해 공부하고 직접 장소를 찾아와 걷나보니 제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죠. 과거로 돌아가 그들의 생각을 물어보게 되고, 그 시대의 공기를 느끼게 되고, 그 장소에 깊게 새겨진 메시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장소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그 장소를 찾았는데 풍경이 너무 좋아서 기분이 바뀔 수도 있고, 경치 좋은 카페에 갔는데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아 슬픈 장소가 될 수도 있죠. 누군가는 그곳에서 삶의 진지한 고민을 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의 갈림길에서 어떤 결단을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장소라도 그 장소에 얽힌 사연을 알게 되면 느끼는 것이 달라질 수 있고요. 그것들이 모이면 결국 그 장소는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다른 감정이 생기고 다른 시선이 생겨 다른 느낌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저는 또 한 번 아름답기만 했던 이 장소에 대한 감정이 바뀌었습니다. 설레임과 따뜻함에서 아련함과 쓰라림으로 말이죠. 

▲ 김구선생 흉상 @김예채 칼럼니스트
▲ 김구선생 흉상 @김예채 칼럼니스트

 

누구에게나 웅크리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넘어질 때도 있고, 쓰러질 때도 있고, 누군가에게 밟힐 때도 있고, 숨어 지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고수는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죠. 끊임없이 생각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내면을 더 단단하게 합니다. 내 안에 숨어있는 잠재력을 응축시키고요. 김구 선생님에게 이 곳 자싱에서의 날들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가 죽기 전까지 했던 수많은 일이 가능했으리라 짐작되고요. 

우리는 너무 빠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다 접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슬로우푸드보다 인스턴트에 더 익숙합니다. 그러다보니 천천히 무언가를 이루어가기보다 한순간에 잘되기를 바라고,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 올라가기보다 하늘에서 재능이 뚝 떨어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로또나 복권을 사는 마음도 아마 비슷한 기조일테고요. 

인생을 살다보면 웅크리고 있어야 할 시간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내 계획대로 어떤 일들이 진행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시간대로 인생의 시계가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마치 시계가 멈춰버린 것 같은 무기력함이 찾아오기도 하고요. 그러나 새로운 것이 오는 데는 그만큼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 시간 없이 맞이한 성공이라면, 성공한 이후에라도 언젠가 그런 시간을 꼭 한 번은 마주하게 됩니다. 

웅크린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닙니다. 평상시에 하지 않던 고민을 통해 더 깊어지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끝나거나 끊어질 줄 모르고 달리던 삶에 브레이크를 거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강제로 멈춰 서는 순간이 오기 전에 현명하게 한 템포 정도 쉬었다 갈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요?

웅크려 있는 시간은 어쩌면 낭비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흐름을 읽는 시간일 것입니다. 김구 선생님께서 자싱에 숨어 지내는 동안 중국의 정세와 세계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본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웅크린 시간은 방향성 없이 질주하던 삶에서 방향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다시, 멀리, 계속 달리기 위해 멈춰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일 테고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같은 우리나라의 전통음식들은 오래 묵혀야 제 맛이 납니다. 선조들은 그 때부터 삶의 지혜가 있었던 것이죠. 그들은 음식을 통해 소중한 정신과 유산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오래 묵혀야 제 맛이 난다는 지혜를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웅크리고 있을 젊음, 청춘들의 하루는 결단코 헛되지 않습니다.

웅크린 이 시간이 훗날 청춘들의 삶을 더 깊게 하고, 맑을 물을 내는 샘이 되는 순간으로 만들테니까요. 오늘은 아직 웅크린 시간을 지나고 있는 청춘들의 내일을 응원합니다.

서두르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당신의 내일에 빛이 비출 날이 곧 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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