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2 _ 루쉰공원 (홍커우공원)

김예채 컬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유튜브 '역사투어하는 여자' 채널 운영중

▲ 윤봉길 의사 흉상 @김예채
▲ 윤봉길 의사 흉상 @김예채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진 용기 있는 의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에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음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어요. 이후 동생과 함께 한학을 공부했고,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농촌사회운동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애국심은 남달랐던 것 같아요. 윤봉길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간 것은 그의 나이 스물넷인 1931년입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했죠.

친근하고 익숙한 인물이지만, 정작 그의 의거 외에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제대로 몰랐던 터라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삶이 생소했습니다.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안고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기념관인 매헌정은 루쉰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어요. 루쉰공원은 예전에 홍커우 공원이라 불렸던 곳이죠. 

▲ 매헌기념관 @김예채
▲ 매헌기념관 @김예채

1932년 일본군은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과 자신들이 일으킨 상하이 사변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했고, 이 소식을 접한 윤봉길 의사는 이날을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물통 모양의 폭탄 한 개와 도시락 모양의 폭탄 한 개를 들고 식장에 입장했습니다.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도시락을 지참하도록 했기 때문에 물통과 도시락 모양으로 위장한 폭탄은 들킬 위험이 없었습니다.
그는 식이 한창 진행될 때 기다렸다는 듯이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는 즉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었죠. 

역사의 현장인 루쉰공원은 생각보다 매우 컸고, 입구부터 잘 꾸며 놓은 누군가의 안식처 같았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이 길을 어떤 각오로 걸었을까요. 자신이 자살할 폭탄까지 가지고 있던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마음과 걸음을 함께 느끼면서 그 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조국을 잃은 한 젊은이가 자신이 죽을 자리를 향해 나아갔던 그 걸음은 주변의 사람들도 느낄 만큼 비장했을 것입니다. 매일이 전쟁터 같고, 살얼음판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현재의 저의 내면과 마주하니 제 걸음도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어떤 뜻을 품고 삶이라는 길을 걷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떠날 뜻을 세웠으면 어찌 다시 살아 돌아오리오.

윤봉길 의사가 1930년 3월 6일 만주로 떠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적은 글입니다.

꼭 대한독립의 뜻을 이루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기도 하지만, 본능적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는 김구 선생을 찾아갈 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 않았을까요.  

▲ 매헌기념관 가는길 @김예채
▲ 매헌기념관 가는길 @김예채

마침 제가 루쉰 공원을 방문한 시기가 이른 봄이었고, 윤봉길 의사의 거사도 봄이었기에 저는 그때의 분위기를 느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큰 공원을 천천히 걷고 있자니 길 사이로 나무에서 이제 막 고개를 내민 잎사귀들이 싱그러움을 더했습니다. 시원한 바람 속에 벚꽃과 동백꽃도 만개했죠. 꽃길 사이를 기분 좋게 산책할 수 있도록 마치 누군가가 도와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어깨 위로 나직이 떨어지는 벚꽃 잎이 저의 안부를 나지막히 물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떨어지는 꽃잎, 피어나는 새싹, 따스한 봄바람까지. 이 길을 걸었던 그는 봄이라는 계절을 느낄 새도 없이 오직 대한독립에 온 마음을 쏟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아름다운 봄을 채 느끼지 못하고 떠나지만 다음 세대만큼은 싱그러운 봄을 마음껏 누리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제 어깨 위로 떨어지던 사랑스런 꽃잎들이 그에게는, 그의 마음에는 하나하나가 가족, 자식, 조국의 후세대들로 다가왔을 것 같았습니다. 손톱만한 벚꽃 잎들을 손등 위에 가만히 올리고 바라보았습니다.
화사하게 피어나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던 꽃잎들이 땅에 떨어져 밟히기 전, 제 손등 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갈 수 있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어깨 위로 떨어진 꽃잎들을 손등 위에 몇 차례 올린 뒤에야 한글로 쓰인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죠. 

▲ 기념관입구 @김예채
▲ 기념관입구 @김예채

누구나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죽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틈새 없이 얼어붙었던 모든 것이 녹아내리고 그곳에서 다시 새싹이 움트는 것을 알기 때문 아닐까요? 당연히 누구에게나 봄은 옵니다.

하지만 다르게 오죠. 내가 무엇을 준비했는지에 따라,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싹을 틔워내는 행복한 봄이 되기도 하고요. 가족을 뒤로하고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뜻을 이룰 각오로 결단해야 하는, 용감하지만 슬픈 봄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따뜻한 햇살 가득한 봄날, 어느 평범했던 봄날,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갔을까요? 도시락 폭탄을 들고 걸어가던 이 길의 체감온도는 살얼음판 같은 겨울이었겠지만, 저 너머의 시선으로 조국의 평안을 바라보며 나아갔던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봄이 와있지 않았을까요?

▲ 폭탄투척비 @김예채
▲ 폭탄투척비 @김예채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생명이 태어나는 봄. 그가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지만 결국에는 잉태하게 될 새로운 생명을 기대하고 낳는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민족의 생명이었던 독립,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에게서는 생명의 향기가 났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봄은 옵니다. 진짜 봄은 계절의 변화에서 감각으로 느끼는 그 이상의 어떤 것, 즉 마음에서 비롯되는 그 어떤 게 아닐까요? 우리 마음의 계절이 바뀌어 따스한 촛불로 새로운 세상을 밝혀갈 내일을 기대해봅니다.

어느 봄날, 저는 벚꽃만큼의 희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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