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자싱1 _ 임정요인 피난처

김예채 컬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유튜브 '역사투어하는 여자' 채널 운영중

▲ 임정요인 침실 @김예채 작가
▲ 임정요인 침실 @김예채 작가

상하이에서 40분 남짓 고속열차를 타고 저장성 북부에 있는 도시, 자싱에 도착했습니다. 공항 같았던 상하이의 기차역과 달리 자싱 역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기차가 자주 서지 않는 간이역 같았어요. 역 밖으로 나가니 도로엔 차가 별로 없었고, 사람들은 주로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죠. 높은 건물보다 낮은 주택이 많아서 시야가 탁 트였습니다. 들판도 나무도 많아 여행으로 피곤했던 몸과 마음이 한순간 정화되는 듯했죠.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임정요인의 거주지가 있는 마음에 내리니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 틈으로 편안하고 푸근한 공기가 저를 감쌌습니다. 마치 어릴 적 시골에 사는 외할머니 댁에 가는 기분이었어요. 어릴 때 거닐었던 그곳으로 저를 데려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지리산 자락 아래의 한 마을에 사셨는데, 어린 제게 그곳은 놀이동산과 같았어요. 길 따라 걷는 양쪽 들판 가득히, 봄이면 후- 부는 재미가 있던 민들레가 피었고, 가을이면 간질간질 볼을 간질이던 큰 갈대가 있었죠. 여름이면 포도밭에서 몰래 포도를 따 먹기도 하고, 겨울이면 하우스에 들어가 양손 가득 딸기를 들고 나오기도 했어요. 몸에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 않고 시골길을 걷고 뛰며 노는 게 그 어떤 놀이기구를 타는 것보다 즐거웠습니다.

외할머니는 봄이면 꼭 쑥국을 끓여주곤 하셨는데 처음엔 어떨지 몰라도 먹다 보면 묘하게 중독되는 맛이었어요. 동이 채 트기도 전, 외할머니는 손주를 위해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넣고 달군 냄비에 된장을 후루룩 풀고 쑥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국을 끓이셨죠. 잠에서 덜 깬 저는 항상 그 뒤에 앉아 국이 얼른 다 끓기를 기다렸어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외할머니의 뒷모습에는 항상 설렘이 묻어났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끈한 밥과 국을 손주에게 먹일 생각에 행복을 담아 밥을 짓고 계셨나 봐요. 그렇게 어릴 적 추억에 잠긴 채 저는 그 길을 걸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건, 이른 아침 손수 밥을 짓듯 정성을 쏟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죠.  

목적지에 채 도착하기도 전,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뜨끈한 밥과 쑥국이 먹고 싶어졌습니다. 끼니를 제대로 챙길 새도 없이 정신없이 바쁜 시대를 사는 요즘, 할머니가 강조했던 밥심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제야 실감이 났죠. 사이다 없이 달걀노른자를 삼키는 것 같은 팍팍한 삶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건, 잡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실체가 있는 추억을 먹고살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게 추억에 빠져 이런 저런 생각을 끝내자 저 멀리 작은 동네가 보였습니다. 
 

▲ 임정요인 거주지 @김예채작가
▲ 임정요인 거주지 @김예채작가

고즈넉한 길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자 임정요인 피난처가 나왔습니다.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제를 피해 상하이를 벗어나야 했고 임시정부의 실제 업무를 진행하던 이들은 항저우로, 김구 선생과 일부 요인들은 자싱으로 피신했어요. 김구 선생은 이곳 자싱에 온 후 장진구 혹은 장진이라 이름을 바꾸고 이 지역 사람처럼 지냈다고 하죠. 

임정요인 피난처 입구는 여느 집과 비슷했습니다.

1층에는 주방과 취사실, 회의실, 응접실이 있고, 2층에는 복도를 두고 4개의 방이 일렬로 있는데 한 방에 한 일가가 함께 지냈다고 해요. 방은 예전 그들의 지냈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한 가족이 어떻게 다 지냈나 싶을 만큼 방은 작았어요. 가구라고는 삐거덕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나무 침대와 최소한의 소지품과 옷가지를 넣을 수 있는 수납장, 책상, 거울이 전부였고요. 방안의 공기는 쓸쓸했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이 왔다갔을 텐데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쳐버린 사람의 뾰로퉁한 표정처럼 감춰놓은 것을 찾아볼 테면 찾아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죠. 

저는 방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가족사진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일순간 분주했던 마음이 가라앉았어요. 가족들이 모두 함께 피난을 왔었다니... 처자식까지 함께 타국살이를 하며 숨어 지내야 했던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었죠. 자식은 물론 자식의 아이에게도 따뜻한 밥을 먹이고 좋은 곳에서 재우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거늘. 여느 아비의 마음처럼, 그들도 그런 바람이 간절했을테죠. 측은하거나 안타까운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보다는 자식들에게 독립의 중요성을 더 알려주고 싶었을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 임정요인 복도 @김예채작가
▲ 임정요인 복도 @김예채작가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려 했을 것입니다. 당장 독립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와 의를 알려주고, 의를 다할 힘을 물려주어 훗날에라도 독립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말이죠. 

임정요인 피난처에서 저에게 무엇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물건은 각 방마다 침대 아래 깊숙이 놓여있던 여행용 가방이었습니다. 일본군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니 언제든 짐을 꾸려 도망갈 수 있도록 준비해둔 것이죠. 그 당시 자싱으로 피신 왔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고국에 있는 집과 땅은 물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독립운동에 쓴 사람들이었어요. 독립이 될 때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작정으로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떠나온 사람들이었죠. 

그런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았을 그들을 보며 지금의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당장 하룻밤을 어디서 머리를 뉘여야 할지, 어떻게 먹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그들과 달리, 저는 세상의 가치와 속도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죠. 평생 한곳에 머물 것처럼 돈을 모으고, 집을 장만하고, 집을 꾸미며, 오늘이 아닌 내일, 언제가 끝일 줄 모르는 미래를 위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못한 채 필요 없는 것까지도 아등바등 끌어안고 사느라 생활의 부피만 늘리기에 급급한 것 같았죠. 

떠나기 위해서는 비워야 합니다. 지금의 저를 돌아보니 중요하지 않고, 가치 없는 일에 매어있거나 붙잡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죠. 의미 없는 것들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삶으로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집, 건물, 가구, 자동차 등 여행을 갈 때 들고 갈 수 없는 것들은 온전한 저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상병 시인이 <귀천>이란 시에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의 시간을 소풍 나왔다고 비유한 것처럼 말이죠.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진짜 진정한 삶의 의미나 가치를 위해서 과감하게 지금의 자리를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들에 매이면 떠나는 것이 어렵게 되죠. 매인 곳에서 벗어나야 하고, 어깨에 올려놓은 무거운 짐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원할 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삶, 간소한 삶을 추구한다면 훨씬 가벼워질 수 있어요. 정말 원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 수 있죠. 

저는 지금 어디에, 무엇에 집중하며 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삶을 가볍게 하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러면 보이지 않던 더 소중한 삶의 가치들이 슬그머니 다가올거라 믿습니다. 더 좋은 친구가 되어보자고 따뜻한 손을 내밀테죠.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택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확실함과 불확실함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내가 꼭 이루어야 할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 더 행복한 삶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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