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든 날이었습니다. 바쁜 일정에 쫓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끼니를 챙기지 못해 잠시 작업실에서 나왔죠. 입맛도 없고 시간도 아낄 겸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를 들고 다시 작업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어요. 그때, 멀리서 걸어오는 저를 위해 누군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참이나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더라고요.“감사합니다.”짧은 인사를 건네며 엘리베이터에 탔습니다. 저를 위해 버튼을 눌러주신 분은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파마를 하다가 잠시 나오셨는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계셨습니다. “아이고, 점심 때가 한참이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셨나요?저는 오늘 운전을 하는데 누가 일부러 장난이라도 한 것처럼 노란불과 계속 마주치는 날이었어요. 평소엔 느긋한데 운전을 할 땐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해지는지 스스로에게 당황하기도 합니다. 운전을 하면서 꼭 시험대에라도 오른 것 같은 기분을 느꼈죠. 노란불에 걸린 신호등 앞으로 다가설 때마다 엑셀러레이터를 밟아야 하나,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나 그 짧은 순간에도 수없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빨리 가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함께 말이에요.수많은 노란불과 내면의 싸움을 한 날은 일을 시작하
자싱의 넓은 길 양옆으로 다소 고풍스러운 중국식 건물이 이어지는 거리에 김구 선생의 피난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때 이른 매화가 피어 덕분에 거리에 꽃향기가 진동했죠. 고즈넉한 거리에 핀 매화 아래서 한참 사진을 찍고 천천히 정취를 느끼며 거리를 걸었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김구피난처라 쓰인 건물 앞에 다다랐어요. 김구 선생이 머물렀다는 2층 침실은 입구가 옷장으로 위장되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한참 헤맸을 만큼 집 구조가 복잡했죠. 혹여나 일본군들이 이곳까지 김구선생님을 찾으러 온다면 도망갈
상하이에서 40분 남짓 고속열차를 타고 저장성 북부에 있는 도시, 자싱에 도착했습니다. 공항 같았던 상하이의 기차역과 달리 자싱 역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기차가 자주 서지 않는 간이역 같았어요. 역 밖으로 나가니 도로엔 차가 별로 없었고, 사람들은 주로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죠. 높은 건물보다 낮은 주택이 많아서 시야가 탁 트였습니다. 들판도 나무도 많아 여행으로 피곤했던 몸과 마음이 한순간 정화되는 듯했죠.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임정요인의 거주지가 있는 마음에 내리니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 틈으로 편안하고 푸근한 공기
루쉰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국공묘(쑹칭링공원)이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 총14기의 묘가 있었는데 1993년 8월에 5기가, 1995년 6월에 2기가 국내로 봉환되었고, 그 자리에는 기념 석판이 남아있어요. 큰 가로수와 넓은 길 때문인지, 만국공묘로 들어서니 마음이 탁 트이는 듯 했죠. 넓은 잔디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단단한 비석이 보였습니다. 고요한 공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고, 부는 바람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만가만 흘러오는 것 같았죠. 공동묘지라는 것을 알고 와서인지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진 용기 있는 의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에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음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어요. 이후 동생과 함께 한학을 공부했고,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농촌사회운동을 했습니다.어릴 때부터 그의 애국심은 남달랐던 것 같아요. 윤봉길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간 것은 그의 나이 스물넷인 1931년입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쁘게 살던 어느 하루, 문득 지금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멈춰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정말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보고 싶었어요. 저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제가 있는 자리에서 떠날 필요를 느꼈던 거죠. 제 안의 수많은 질문에 답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장소로 택한 곳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였어요. 중국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여덟
중국 다롄 공항에 내려 약 한 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하면 뤼순이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이 지역에는 조선의 아픈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먼저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이동했는데요.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송치되어 재판을 받은 곳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법정은 건물 2층에 있어요. 그 때의 모습과 똑같이 복원해 놓은 재판장은 공기부터 차가웠습니다. 재판 변론 중 안중근 의사는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중국 옌지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4시간 남짓 달려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인데 그 자리에 기념관이 세워져 있어 찾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기념관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손도장, 흉상, 안중근의사가 의거를 결행하기까지 하얼빈에서 보낸 11일간의 행적, 각종 사료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로도 설명되어 있었고요. 또 기차 플랫폼 앞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도 표시되어 있었죠.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안중근의사와 이토히로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서 가야할 곳은 크라스키노였습니다. 바로 안중근의사 단지 동맹비가 있는 곳이죠. 비교적 먼 곳에 있고, 그 지역에는 단지동맹비를 제외하고는 다른 유적지가 없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지만 저는 그래서 더 가보고 싶었습니다.가이드는 비포장도로가 포함되어 있어서 가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고 했죠. 4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다고 느꼈을 즈음, 버스는 잠시 멈췄습니다. 고려인의 첫 정착지인 지신허 마을 입구에 다다랐기 때문이죠. 지신허 마을은 1863년 한인 열 세가구가 최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우수리스크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이곳으로 달려가게 된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우수리스크는 러시아 전체 면적에 비하면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려인들에게는 가장 큰 도시로 기억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아픈 역사가 남아있습니다. 조금만 언급하자면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톡과 거리상 가까웠기 때문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었어요. 독립운동을 하다가 위험하면 피신을 오기도 했고, 조선에서 먹기 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비교적 땅이 넓은 곳으로
코로나 이전에는 시간만 나면 전국 방방곡곡 또는 해외로 역사탐방을 떠나는 '프로역사탐방러' 그리고 '역사 투어하는 여자'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이기도 한 김예채 작가의 신작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가 출간됐다. 김예채 작가의 에세이는 작가와 독자가 만들어가는 특별한 책이다. 이 책은 작가의 글 사이사이, 독자 참여형 원고들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작가와 함께 ‘인생’이라는 여행길의 로드맵을 함께 그려나가는 것이다. 김예채 작가는 삶의 한복판에서 그녀만의 따뜻한 시선으로 일상의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꿈을 위해 온
코로나로 해외에 나가지 못한 채 벌써 1년 6개월이 되어갑니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랜선으로나마 제가 다니는 조금은 색다르고 약간은 특별한 여행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많이 여행하는 곳 속에 숨어있는 역사유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주로 다닙니다. 쉼이나 힐링을 위한 여행 사이에 가치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곳을 들러보는 것이 좋더라고요. 또 우리나라가 아닌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유적지를 방문할 때면 깊숙이 숨겨 놓았던 애국심이 샘솟는다고 해야 할까요? 나의 나라, 우리의 역사를 잘 기억하고 알려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