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3 _ 만국공묘 (쑹칭링능원)

김예채 컬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유튜브 '역사투어하는 여자' 채널 운영중

▲ 만국공묘입구 @김예채 컬럼니스트
▲ 만국공묘입구 @김예채 컬럼니스트

루쉰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국공묘(쑹칭링공원)이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 총14기의 묘가 있었는데 1993년 8월에 5기가, 1995년 6월에 2기가 국내로 봉환되었고, 그 자리에는 기념 석판이 남아있어요. 큰 가로수와 넓은 길 때문인지, 만국공묘로 들어서니 마음이 탁 트이는 듯 했죠. 넓은 잔디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단단한 비석이 보였습니다. 고요한 공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고, 부는 바람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만가만 흘러오는 것 같았죠. 공동묘지라는 것을 알고 와서인지 비석 위로 고독이 느껴졌습니다. 비석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잔디들이 고인들을 위무하는 것 같아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보았습니다. 

 이들은 왜 낯선 곳에 묻힐 수밖에 없었는지 석판 하나하나를 지나며 묵념해 봤습니다. 구국의 일념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한 채, 2억만 리 타국에서 눈을 감았던 그들의 심정은 비통했을 거예요. 그 죽음이 저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더 귀 기울여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넓은 잔디 사이에 자리 잡은 비석을 바라보다가 이 많은 비석 사이에서 한국인 묘지를 어떻게 찾을까 고민했습니다. 별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확인하는 수밖에는. 찬찬히 그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으며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조심스럽게 짚어가며 나직이 이름을 불러나갔죠. 그렇게 한참을 외국인들의 이름만 겨우겨우 부르다가 마침내 한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신규식. 너무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이름 위에 쌓인 잔디와 흙을 털어냈습니다.

▲ 신규식선생 묘 @김예채 컬럼니스트
▲ 신규식선생 묘 @김예채 컬럼니스트

신규식 선생님은 외국인 묘지인 만국공묘에 안치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참여하였고, 이후 상하이 교민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죠. 신규식 선생님이 특히 중시한 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상하이에 ‘박달학원’을 세워 조국에서 찾아온 청년들을 교육했고, 박은식, 신채호, 문일평, 조소앙 등이 힘을 모아 선생으로 참여했습니다. 

신규식 선생님은 평생에 ‘겨래의 얼’을 강조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겨레의 얼이란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양심과 정신입니다. 역사와 나라를 가슴에 담고 절대 잊지 않는 정신 말이죠. 그는 저서 ‘한국혼’에서 나라가 망한 가장 큰 원인은 가슴속에 간직한 얼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라를 잃은 우리에게 단 하나 남은 것은 가슴속에 있는 겨레의 얼인데,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우리 겨레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겨레의 얼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죠. 얼굴은 얼을 담는 그릇이라는데 요즘 우리는 얼굴을 고치고 꾸미는 데는 신경 쓰지만 정작 얼굴에 담길 흔적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합니다. 진짜 내 얼굴에는 얼이 담겨있을까? 그 자리에 서서 오래 고민했습니다. 

 신규식 선생 비석 주변에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비석이 있습니다. 그중 2개의 비석 옆에 무궁화가 한 송이씩 있었어요. 누군가 가져다놓은 것이었겠지만 비석 옆에 자리한 무궁화마저 꼿꼿하게 느껴졌습니다. 무궁화는 끈질기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생력이 강해 악조건 속에서도 피어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얼과 맥이 상통하여 국화가 되었다고 해요. ‘일편단심, 영원’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비석 옆에 핀 무궁화를 보니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닢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오랫동안 그들이 가슴속에 품고 있던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 송이의 무궁화로 피워낸 모습을 마치 이 시가 대변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가슴 찡한 감격이 몰려왔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립을 위해, 완전한 한 송이의 무궁화를 위해 울었을까요?

신규식 선생님이 말한 겨레의 얼은 꼿꼿하게 피어있는 한 송이 무궁화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한 송이의 무궁화.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무궁화를 중국에서 만나니 어찌나 반갑고 뭉클하던지요. 무궁화는 마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타국에서 느꼈을 외로움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비석 앞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고독하고 쓸쓸하지만 굳세게 이겨냈던 모습처럼 한 송이의 무궁화도 단단하지만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있었습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만국공묘를 나오는 길,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애국가 가사의 의미를 하나하나 곱씹어 되새겨 보았습니다. 평소엔 부르지 않던 애국가가 평온하게 제 입술에서 흘러나왔죠. 만국공묘에 묻혔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짧게나마 아래에 소개하려 합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평온한 하루를 보낼 수 있으니까요. 또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 분들의 희생 앞에 작은 무궁화 한 송이 내려놓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 독립운동가 묘 @김예채 컬럼니스트
▲ 독립운동가 묘 @김예채 컬럼니스트

 

신규식(1879-1922)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죽음으로 항거하려고 음독했다가 실패, 오른쪽 눈만 실명했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의 혁명가들과 친교를 맺었으며 쑨원의 신해혁명에 가담했다.

박은식과 대동보국단을 조직, 잡지 ‘진단’을 발간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부의장에 선출, 법무총장을 거쳐 1921년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이 되었다.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해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김인전(1876-1923) 

 

191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뽑히고, 재무예산위원·정무조사특별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의정원 부의장도 지냈다. 1923년 5월 사망하여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다가, 1993년 8월 유해가 환국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노백린(1875-1926)

1907년 안창호와 신민회에서 활약하다가 군대가 해산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광산·피혁상 등을 경영했다.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군사훈련에 힘썼고, 3·1운동 후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맡았다. 192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 양성에 진력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일운동에 종사한 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병사했다.  

 

박은식(1859-1925)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했다.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해 신규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임정의 국장으로 상하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안태국 (미상-1920)

 

1905년 을사조약 후 평양에서 협동사를 설립, 실업구국운동에 종사했다. 1907년 양기탁·안창호·전덕기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인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 평안남도 총감이 되고 신민회 최고위간부로 활동하였다. 1910년 안명근사건을 기회삼아 일제가 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려는 운동을 저지하려고 양기탁 등을 붙잡을 당시 보안법 위반으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1911년 7월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일제가 신민회를 탄압하고 해체하기 위해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을 조작하여 1911년 9월 전국의 신민회 회원 800여 명을 검거하고 기소할 때, 복역 중 재기소되어 1912년 9월 징역 10년형을 언도받았다. 1916년 출옥하자 바로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후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와 협의하려고 상해로 갔다가 병사했다.

 

연병환(1878-1926)

 

만주로 건너가 1907년 중국인으로 귀화한 뒤, 영어 능력과 세무직 경험에 대한 영국인 친구의 추천을 통해 1908년 7월부터 중국의 용정 해관에서 일한다. 1912년 연길현에서 여자중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에도 종사하였고 용정 세관에서 일하면서 얻은 정보와 자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9년 10월 상하이 세관으로 발령된 그는 가족과 함께 1920년 초에 상하이로 이사했다. 이에 제국주의 일본은 그를 현직에서 퇴직시킬 것을 요구하며 배일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으로 전출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던 만큼 연병환은 일제가 가장 경계하는 독립운동가 중 하나였다. 결국 중화민국 당국은 연병환을 복건성 산도오 해관으로 전근시키게 된다. 연병환은 중국 해관에서 근무하면서 만주 독립군인 중광단의 군사공작에 가담하고 무기와 군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중광단은 청산리대첩에서 승리하게 된다. 1926년 5월 14일 진강 임소에서 별세한다. 

 

윤현진(1892-1921)

 

1909년 중국으로 가 상하이와 베이징을 둘러보며 외국의 저명한 정치가와 여러 독립지사들과 만났다. 1914년 일본으로 유학간 그는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에 가담해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1915년 봄 김철수, 장덕수, 정노식, 전익지 등과 함께 도쿄 인근의 다마천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돌려 마시는 열지동맹을 맺었다. 열지동맹원들은 앞으로 상하이, 싱가포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상호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결의했다. 대동청년단에 가담했으며, 백산상회에 관여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을 맡고 있던 그는 경남은행에 사직서를 제출한 뒤 3월 21일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독립임시사무소 구성원으로 활동했고, 1919년 4월 13일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7개 위원회 중 신익희 이외 8명과 함께 내무위원으로 선정됐다. 이후 의용단을 조직했으며,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을 발간하기 위해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9월 11일 재무총장 이시영과 함께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어 1921년 2월 22일까지 역임했다. 1921년 9월 17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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