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싱의 넓은 길 양옆으로 다소 고풍스러운 중국식 건물이 이어지는 거리에 김구 선생의 피난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때 이른 매화가 피어 덕분에 거리에 꽃향기가 진동했죠. 고즈넉한 거리에 핀 매화 아래서 한참 사진을 찍고 천천히 정취를 느끼며 거리를 걸었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김구피난처라 쓰인 건물 앞에 다다랐어요. 김구 선생이 머물렀다는 2층 침실은 입구가 옷장으로 위장되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한참 헤맸을 만큼 집 구조가 복잡했죠. 혹여나 일본군들이 이곳까지 김구선생님을 찾으러 온다면 도망갈
상하이에서 40분 남짓 고속열차를 타고 저장성 북부에 있는 도시, 자싱에 도착했습니다. 공항 같았던 상하이의 기차역과 달리 자싱 역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기차가 자주 서지 않는 간이역 같았어요. 역 밖으로 나가니 도로엔 차가 별로 없었고, 사람들은 주로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죠. 높은 건물보다 낮은 주택이 많아서 시야가 탁 트였습니다. 들판도 나무도 많아 여행으로 피곤했던 몸과 마음이 한순간 정화되는 듯했죠. 기차역에서 택시를 타고 임정요인의 거주지가 있는 마음에 내리니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 틈으로 편안하고 푸근한 공기
루쉰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국공묘(쑹칭링공원)이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 총14기의 묘가 있었는데 1993년 8월에 5기가, 1995년 6월에 2기가 국내로 봉환되었고, 그 자리에는 기념 석판이 남아있어요. 큰 가로수와 넓은 길 때문인지, 만국공묘로 들어서니 마음이 탁 트이는 듯 했죠. 넓은 잔디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단단한 비석이 보였습니다. 고요한 공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고, 부는 바람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만가만 흘러오는 것 같았죠. 공동묘지라는 것을 알고 와서인지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진 용기 있는 의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에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다음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어요. 이후 동생과 함께 한학을 공부했고,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농촌사회운동을 했습니다.어릴 때부터 그의 애국심은 남달랐던 것 같아요. 윤봉길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간 것은 그의 나이 스물넷인 1931년입니다.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쁘게 살던 어느 하루, 문득 지금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멈춰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정말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보고 싶었어요. 저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제가 있는 자리에서 떠날 필요를 느꼈던 거죠. 제 안의 수많은 질문에 답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장소로 택한 곳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였어요. 중국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여덟
중국 다롄 공항에 내려 약 한 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하면 뤼순이라는 지역이 나옵니다. 이 지역에는 조선의 아픈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먼저 뤼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이동했는데요.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송치되어 재판을 받은 곳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법정은 건물 2층에 있어요. 그 때의 모습과 똑같이 복원해 놓은 재판장은 공기부터 차가웠습니다. 재판 변론 중 안중근 의사는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우수리스크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이곳으로 달려가게 된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우수리스크는 러시아 전체 면적에 비하면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려인들에게는 가장 큰 도시로 기억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아픈 역사가 남아있습니다. 조금만 언급하자면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톡과 거리상 가까웠기 때문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었어요. 독립운동을 하다가 위험하면 피신을 오기도 했고, 조선에서 먹기 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비교적 땅이 넓은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