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선생 기념관’, ‘이상설 유허지’

김예채 컬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어른들을 위한 월간 인문학학습지 ‘한걸음’ 집필진

수이푼강
▲ 수이푼강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우수리스크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이곳으로 달려가게 된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우수리스크는 러시아 전체 면적에 비하면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그러나 우리 고려인들에게는 가장 큰 도시로 기억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아픈 역사가 남아있습니다. 

조금만 언급하자면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톡과 거리상 가까웠기 때문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었어요. 독립운동을 하다가 위험하면 피신을 오기도 했고, 조선에서 먹기 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비교적 땅이 넓은 곳으로 이주해 개척해서 살기도 하고요. 그래서 고려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해 놓은 고려인 문화센터가 있습니다. 

또한 척박한 땅을 개척해 잘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한 순간에 모두 이주시켜 아픈 역사로 남았던 사건이 있잖아요. 바로 그 고려인 강제이주의 시작점인 라즈돌리노예역도 남아 있고요. 오늘 우리가 이야기 나눌 최재형 선생 기념관과 이상설 유허지도 바로 우수리스크에 있습니다.
 

▲ 최재형 기념관에 있는 '최재형 흉상'
▲ 최재형 기념관에 있는 '최재형 흉상'

최재형 선생 기념관은 1층짜리 단독주택으로 최재형 선생님이 1920년 4월 일본헌병대에게 붙잡혀 총살되기 전까지 2년가량 머물렀던 곳입니다. 이 고택을 최재형 선생 기념관으로 개관한 것이죠. 

최재형 선생님은 의병활동, 언론 및 교육사업, 권업회 조직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특히 권업회가 설립한 신한촌의 한민학교는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민족교육의 중요한 기관으로 성장했죠. 1908년에는 안중근, 이위종, 이범윤 등과 동의회를 조직해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안중근이 이끌었던 의병부대는 함경도 경흥, 경원, 회령 등지에서 승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수적인 열세로 퇴각했습니다.  

어쩌면 생소할 지도 모르는 최재형 선생님은 안중근의사의 하얼빈의거를 도운 후원자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최재형 선생님이 사장으로 있던 대동공보사에서 하얼빈의거를 계획했기 때문이죠. 안중근 의사는 의거의 계획과 자금 조달을 대동공보의 주필인 이강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알렸고, 대동공보는 하얼빈 의거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국내외에 알리게 되었죠. 

최재형 선생님은 의거 성공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사에 400루블을 보내 축하하였으며 일제가 지목한 의거 연루자 37명 중 첫 번째로 꼽히게 됩니다. 

이런 최재형 선생님의 애칭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페치카라는 단어입니다.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이에요. 최재형 선생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으로 한인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시베리아 독립운동의 대부로 실천적 항일 기업가이기도 했죠. 그래서 기념관 안에도 난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하셨던 업적만 둘러보아도 난로처럼 뜨거운 마음을 가지셨기에 한인들과 조국을 위해 힘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기념관에서 나와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이상설 유허지였습니다. 이상설 선생님의 유허비는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 옆에 있습니다. 
 

▲ 이상설 선생 '유허비'
▲ 이상설 선생 '유허비'

유허지는 오랜 세월 쓸쓸하게 남아있는 옛터를 말하는데요. 이곳에 유허비가 있는 이유는 이상설 선생님의 유해가 수이푼 강에 뿌려졌기 때문이죠. 돌아가시기 전 수이푼 강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받들었던 것입니다. 

제가 탐방 갔을 때에는 추운 날씨 때문에 수이푼 강이 꽁꽁 얼어있었고 찬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렸습니다. 뺨을 때리는 바람이 마치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 것 같아 자연스레 고개를 젓게 되었습니다.   

이상설 선생님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제에게 ‘순사직’하라고 상소하고 종로 거리에서 머리를 땅에 찧으며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할 만큼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북간도에서 서전서숙을 개숙해 학생들을 가르치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는데요.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실패했는데 이후 이상설 선생님은 연해주로 망명하게 됩니다.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한 이상설 선생님은 십삼도의군 창설과 성명회 결성, 권업회 활동 등을 지도하셨습니다. 그리고 1915년 상해에서 신한혁명단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와 1916년부터 병석에 눕게 되셨지요. 선생님은 유언을 남겨두고 이듬해인 1917년 4월 1일 우수리스크 대년병원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아래 글은 이상설 선생님의 유언입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 선생님의 유언은 필리핀의 독립투사이자 문인이었던 호세 리잘의 유언과 참 많이 비슷합니다.

“내 유품을 남기지 말아라. 나는 뜨는 해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대들은 조국의 새벽을 볼 것이다. 그것을 반갑게 맞이하라. 그리고 그 밤사이에 죽어간 이들을 결코 잊지 말아라”

죽는 날까지 조국을 위해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의 뜨거운 마음과 정신, 난로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불꽃임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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