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기 바람따라 사도세자의 서사가 느껴지는 ‘융·건릉’
효성 지극했던 정조대왕의 이야기가 남아있는 효(孝)의 근본사찰 ‘용주사’

 

▲ 용릉
▲ 융릉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어서 마음이 부산해지기 쉽지만 가족이나 친지와 함께 나들이 삼아 효심이 깊은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 있는 융릉과 그 옆에 정조대왕의 건릉. 그리고 융릉을 위해 세워진 용주사를 방문해 어진 선왕 정조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중흥을 이끌었던 정조 대왕이 꿈꾸었던 신도시, 수원 화성은 다양한 TV 매체를 통해 방송되어 이미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나 방화수류정에 분홍빛 영산홍이 가득 피어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피크닉을 즐기러 나오는 곳이고, 화성 주변으로 열기구 체험도 있으니 낮과 밤 모두 사랑을 받는 관광지이다. 

그런 화성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화성시 화산(花山)에는 정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융릉과 용주사가 있다. 

수원 화성에 비해 찾는 사람이 적고 자연도 즐길 수 있어 언택트 여행지로 최적인 곳이다. 그중에서도 세계문화유산 화성 융·건릉과 용주사는 관광지 이상의 우리 민족의 성정(性情)을 담은 뜻 깊은 곳이다.

솔향기 바람 따라 전해지는 아련한 효심을 느끼며 무심히 걷다보면, 효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풀이난다는 옛 속담이 저절로 떠오른다. 

고즈넉하고 품위 있으면서도, 이끼와 돌부리하나 작은 풀 한 포기도 조화롭게 느껴지는 것은 사계절 푸른빛을 잃지 않는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의 정기가 마치 부모의 품처럼 따듯하고 맑은 생명의 기운을 전해주기 때문이리라. 또한 일본의 단정한 신사나 미국의 웅장한 국립공원에서도 느낄 수 없는 정갈하고도 애잔한 감상은 풍경 위에 담긴 역사의 풍파가 담긴 서사적 요소 때문일 것이다. 

1762년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난 뒤, 현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수은묘에 묻혔다. 

하지만 그때는 폐세자의 신분이었기에 능이라는 명칭을 쓸 수 없었지만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1789년(정조 13년)에 영우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이 되었다. 

이후, 1815년(순조15년)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현륭원에 합장릉으로 재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3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불렀다. 
 

▲ 용주사
▲ 용주사

용주사는 정조대왕의 효심에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원찰로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여 만든 사찰이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국왕이 만든 사찰이기에 숨겨진 이야기가 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원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 되었다가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만들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지었다고 한다. 그렇게 용주사는 아버지의 능을 돌봐주는 능사 역할을 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비명으로 원통하게 숨진 아버지를 생각하며 능을 이곳으로 옮기고 불현 듯 아버지가 그립다거나 전날 밤 꿈자리만 고약해도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대왕은 손수 능을 찾아 살핀 후 꼭 용주사에 들러 능사를 당부하고 왔다고 한다. 

한번은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날, 그날도 대왕은 바쁜 국사를 잠시 물리고 현륭원을 참배한 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때 문득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이 왕의 눈에 띄자 순간 정조의 눈에서 파란불이 일었고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송충이를 잡아둔 정조는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도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히느냐!”하고 송충이를 이빨로 깨물어 죽여 버렸다고 한다. 이런 왕의 돌발적인 행동에 함께 갔던 시종들 모두 당황해 하다가 주변 송충이를 모두 없애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용주사의 창건은 정조의 효심이 불심으로 승화되어 이룩되었기에, 오늘날까지도 용주사는 ‘효의 근본사찰’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는 정조가 승하한 후 아버지의 융릉 바로 옆 건릉에 함께 모셔져 있기에 이곳을 융·건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역시 정조의 지극한 바람이었을까? 다른 지역에 있는 조선 왕릉과 비교해 봐도 부자가 함께 모셔져 있는 왕릉이 드물기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융·건릉 숲길
▲ 융·건릉 숲길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알려진 소나무는 비옥한 곳보다 척박한 환경에서 힘들게 자라야 장수할 수 있다. 융·건릉을 빼곡히 감싼 소나무 길을 걸으며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부모의 묘를 수호해달라는 정조의 깊은 효심을 헤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강한 회복의 기운을 얻어 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자연처럼 자애로운 부모의 마음을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값진 한나절 여행이 될 것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힐링앤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