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소프라노 김정민 | 앙상블 안음 대표

농담 반, 진담 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의 겨울을 겪어 본 사람은 왜 독일에 수많은 철학가와 예술가가 나오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이란 것이지요. 아침 8시가 되어야 어렴풋이 빛이 비치고 오후 3시부터 해가 저물어가는 독일의 겨울. 나뭇가지는 앙상하고 높은 빌딩이 없어 더 황량해 보이는 도시의 모습에 마음마저 웅크려집니다.

한국의 겨울과는 조금 다른 뼛속이 시린 듯한 습한 추위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바닥에선 냉기가 올라오고 벽에 붙어 있는 하이쭝과 촛불에만 온기를 의지합니다. 털 실내화를 신고 담요를 둘러 덮고 핫초코를 마시며 따뜻함을 느껴보고 있자면 전기도 없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 길고도 긴 어둠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지 궁금해집니다. 

▲ 사진, 김정민 컬럼니스트 제공
▲ 사진, 김정민 컬럼니스트 제공

긴 어두움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고독함은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온전히 이 겨울을 마주해야만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었던 건 바로 인간의 고독에서 파생한 끝없는 삶에 대한 질문과 성찰이지 않았을까요. 커피 또는 맥주잔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는 시간을 통해 추위를 잊을 생기를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독일의 겨울을 보내며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해 11월은 한 달 내내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눈이 온다고 좋아하던 것도 잠시, 오르막에 있던 기숙사에 올라갈 때마다 여간 곤혹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눈을 치워놓으면 그새 또 쌓이고, 쌓이고. 인도와 차도의 경계는 없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당시 기숙사에 올라가는 길에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 하나가 있었고, 그 앞에는 존재감이 매우 큰 전나무가 있었습니다. 사시사철 내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풍기곤 했지요. 눈이 소복이 쌓인 전나무를 보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말랑해 지면서 한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냈던 크리스마스가 떠올랐습니다.
잠시 서서 내 키보다 훨씬 큰 그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눈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나무를 바라보다 더 높이 눈을 들어 머리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는데 콧등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점점 따뜻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보니 온 세상이 끝없이 하얬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려 땅만 보고 걸을 땐 몰랐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어두운 저녁 집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불빛, 아주 간혹 지나가는 차들의 스포트라이트, 운치 있게 서 있는 가로등, 가로등의 빛을 받으며 떨어지는 눈송이들, 그 가운데 홀로 서 있지만 외롭지 않았던 나. 그날의 장면과 감정은 하나의 사진처럼 각인 되어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마냥 춥고 어둡게만 느껴졌던 독일의 겨울은 그렇게 서서히 익숙해져갔고 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갈수록 독일의 음악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의 시야는 넓어져 갔습니다. 

▲ 사진, 김정민 소프라노 제공
▲ 사진, 김정민 소프라노 제공

겨울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캐럴 음악이 흘러나오듯 어김없이 연주되는 클래식 곡들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 가난한 보헤미안 젊은이들의 가슴 아픈 사랑을 그린 푸치니의 오페라 <La bohème>(라 보엠)과 고독한 한 남자의 방랑을 노래하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Winterreise>(겨울 나그네)이지요.

오늘은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얼어붙은 눈물이 뺨 위로 떨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울고 있었단 말인가.
눈물아, 나의 눈물아, 너는 차가워졌구나. 마치 아침이슬처럼 얼어버린 것이냐.
하지만 너는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의 샘에서 뚫고 나오는구나. 
마치 한겨울의 얼음을 다 녹여버릴 듯이‘

<겨울 나그네>의 곡 중에 3번째 곡인 <Gefror’ne Tränen(얼어붙은 눈물)>의 가사입니다. <겨울 나그네>는 직역하면 ‘겨울 여행’이라고 해석됩니다.

한겨울에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한 남자가 애처로운 실연의 고통과 삶의 절망을 안고 떠난 방랑을 표현한 곡이지요.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쓸쓸함을 배경으로 그는 고독과 그리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을 그리다가 결국 쓸쓸한 절망의 끝을 노래합니다.

이 곡은 남자 성악가들이 한 번쯤은 무대에서 전곡을 불러보고픈 로망이 있는 곡인데 화자가 확실히 남성이기도 하고 슈베르트의 진가가 드러나는 대표적인 아름다운 곡이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에 살았던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가 쓴 시에 슈베르트가 멜로디를 붙여 만들었습니다. 시를 지은 뮐러는 당시에 한 여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뮐러는 실연의 아픔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게 되었지요. 그곳에서 다시 돌아온 후 이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슈베르트 역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위해 많은 곡을 썼지만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실연의 아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곡에는 잠시 스쳐 지나갔던 사랑의 감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깊은 인간의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많은 연구가는 아마도 슈베르트가 살아생전 늘 가난했고 인정받지 못해 처절했던 절망감과 좌절을 작품에 투영하지 않았을까 이야기합니다.

<겨울 나그네>를 작곡하고 불과 1년 뒤 슈베르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겨울 나그네>를 작곡할 때부터 몸이 안 좋았던 슈베르트는 어쩌면 이미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을 느끼며 자신의 메시지를 남겨 놓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겨울 나그네>는 실연의 아픔뿐만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외로움, 그리움, 혼란, 고독, 절망 등 다양한 내면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요. 

▲ 사진, 김정민 소프라노 제공
▲ 사진, 김정민 소프라노 제공

깊은 밤 사랑하는 여인의 집 앞에서 떠나는 장면으로 첫 곡이 시작됩니다.
시시각각 방향이 변하는 바람개비, 얼어붙은 눈물, 원치 않아도 흔들리는 갈대, 그녀의 이름을 아무리 써도 지워지는 냇물, 불행을 상징하는 듯한 도깨비불, 아무런 소식도 전해주지 않는 우편 마차, 자신의 운명 같은 까마귀, 깨어보면 더욱 좌절을 느끼게 해주는 환상, 사람들이 많은 마을에 도착하지만 투명인간 같은 자신, 땅에 떨어진 나뭇잎, 폭풍이 몰아치는 아침 등등... 방랑하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서 그는 더욱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네에서 거리의 늙은 악사를 만났습니다. 동전 하나 없는 빈 깡통을 둔 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늙은 악사에게 그가 손을 내밀며 묻습니다. “노인이여, 제가 당신과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제 노래에 맞추어 당신의 풍금을 연주해주실 수 있나요?” 노인의 대답 대신 풍금 소리만 나지막이 들리며 곡은 끝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그네의 방랑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왔던 ‘죽음’이 마침내는 사람의 모습(풍금 악사)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고독한 여정을 보았을 때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모든 재앙이 흩어져 나갔음에도 마지막 희망은 남아있었던 것처럼 나그네도, 슈베르트도 밑바닥의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어 손을 내밀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사람 때문에 긴 시간 침묵으로 방랑하던 그는 결국 사람으로 인해 침묵을 깨게 되었습니다. 홀로 방랑하던 나그네는 동질감을 느낀 노인과 함께하길 원했지만, 이 노래에 노인의 대답은 없습니다. 그저 노인이 연주하는 풍금 소리만이 들릴 뿐입니다. 마치 관객에게 상상하도록 던진 ‘열린 결말’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지요. 완전한 절망의 완성이든, 새로운 희망이든 구슬픈 풍금 소리는 우리에게 정답 없는 삶의 질문으로 다가와 노래가 끝났음에도 쉽게 음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 1791-1872)는 “슈베르트는 시가 노래를 하고 음악이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라고 했습니다.

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슈베르트는 짧은 가곡에서도 풍부한 감정을 노래하고 섬세하고 극적인 표현으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만듭니다. <겨울 나그네>는 총 24곡으로서 전곡을 노래하면 약 70분가량 걸리는 긴 작품입니다. 하지만 지루할 수 없는 것은 가사의 멜로디와 피아노 반주가 각 곡의 이야기를 마치 눈앞에 보이듯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3번째 곡 <Gefror’ne Tränen(얼어붙은 눈물)>의 반주는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듯하고, 5번째 곡 <Der Lindenbaum(보리수)>에서는 보리수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정교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연가곡 <겨울 나그네>의 모든 곡은 유명해서 발췌되어 연주하거나 감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해석된 가사를 보시면서 전곡을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한 명의 화자가 이끌어 가는 1인 독백극을 보듯 우리는 한 사람의 외롭고 애처로운 삶의 궤적에 함께 하는듯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와 함께 나의 내면도 들여다보면서 말이지요. 이 겨울에 마치 잊을 수 없는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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