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김정민 | 앙상블 안음 대표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왜 우리가 아는 작곡가들은 다 남자뿐일까요?

아무리 떠올려 봐도 여성의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 여성의 선거권이 생긴 지는 불과 10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1906년 핀란드가 여성의 선거권을 처음으로 인정했고, 그 뒤 1913년 노르웨이, 1915년 덴마크를 시작으로 여성의 선거권이 주어졌습니다. 1918년이 되어서야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몇몇 국가와 미국(1920년)이 여성의 선거권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인권은 민주주의의 발전과는 별개로 여겨졌던 듯합니다.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했는데 놀랍게도 그 해가 1971년이었으니 말입니다.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이 살았던 19세기는 클래식의 황금기였습니다. 베토벤이 활짝 열어준 낭만주의 시대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통해 인간 본연의 감정과 자연에 대한 찬미를 가감 없이 표현하였습니다. 클라라는 낭만 시대 대표적 작곡가인 슈만의 뮤즈이자 끝까지의 그의 곁을 지킨 아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로화 통합 이전 독일의 화폐 100마르크에는 클라라의 얼굴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독일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지요. 마치 우리나라의 신사임당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사실 클라라는 당대 유명한 음악가였습니다.

피아노 신동이었던 클라라는 9살의 어린 나이에 연주자로 데뷔했고, 전 유럽에서 러브콜이 오는 성공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같은 피아니스트였던 리스트와 쇼팽뿐만 아니라 문학가 괴테 역시 클라라의 연주에 찬사를 보낼 정도였답니다.

클라라는 작곡 재능도 뛰어났습니다. 13세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은 멘델스존의 지휘로 게반트하우스에서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 가도를 가던 중 그녀는 자신보다 9살이나 많은 아버지의 제자인 슈만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스승인 비크는 당연히 이 사랑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날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능력 없는 빈털터리 슈만에게 사랑하는 딸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클라라를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들은 뜨겁게 사랑했고, 결혼을 위한 3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허락을 얻어 1840년 결혼하게 됩니다. 

19세기는 클래식의 황금기였으나 여성의 지위는 낮았던 시기였습니다. 클라라는 피아노 선생이자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야심으로 전문 연주자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지만, 대다수 여성들은 교양과 사교를 위한 수단으로서 음악을 배웠습니다. 모차르트의 누나인 난넬은 결혼함과 동시에 연주자로서의 삶이 단절되었습니다.

멘델스존의 누나인 파니도 멘델스존 못지않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명문가였던 가족들의 반대로 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던 파니는 남동생 멘델스존의 이름을 빌려 작품 활동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여성이 전문음악가로 활동하기엔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여성이 클라라였습니다. 클라라는 관습과 편견 속에서 당당히 그녀만의 소리를 내며 뛰어난 음악가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녀의 인기는 상상 초월이었습니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이 몰려들었고, 클라라의 이름을 딴 디저트가 만들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은 마치 유명 여성 연예인과 무명 남성 연예인의 결혼처럼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클라라는 슈만의 곡들을 사랑했고, 슈만은 클라라의 연주를 동경했습니다. 클라라를 향한 사랑의 감정으로 만든 슈만의 수많은 명곡이 바로 이 시기에 탄생하게 되었죠. 그들의 만남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었습니다.
부부이자 동료로서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고, 음악원에서 제자들을 키우며 작곡 활동도 했습니다. 클라라는 연주 때마다 슈만의 곡들을 초연했는데 그녀의 유명세로 인해 그의 곡은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슈만이 작곡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큰 발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은 그녀의 화려한 삶을 바꿔놓기 시작했습니다. 여덟 명의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클라라는 충분한 연습을 할 수 없었고, 한 대밖에 없던 피아노는 슈만에게 늘 양보해야 했습니다. 피아노를 치던 고운 손은 집안일로 거칠어져 갔습니다. 반면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린 슈만은 존경받는 음악가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결혼 생활 동안 클라라는 결코 음악을 놓지 않았습니다.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라라의 이름은 점점 슈만의 그늘에 가리어져 갔습니다.

1854년 슈만은 정신병에 시달리던 중 강에 투신했습니다. 운 좋게 살아났지만, 이후 남은 삶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클라라는 작곡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지요. 작곡을 위한 시간적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일곱 아이(한명은 일찍 사망함)의 양육과 남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어느덧 공연은 생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슈퍼스타에서 슈퍼맘이 되어야 했던 클라라. 너무나 불행한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그녀가 끊임없이 연주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슈만이 정신병원에 있었던 2년 동안 클라라는 그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의사가 슈만의 상태를 위해 면회를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낯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클라라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쉴 틈 없이 해야만 했던 공연은 그녀를 지치게도 했지만 때로는 음악이 가혹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슈만이 죽기 이틀 전에야 클라라는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미소 지으며, 힘겹게 나를 안아주었다. 그의 팔다리는 더 이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세상 그 어떤 것과도 그날의 포옹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슈만의 죽음으로 16년의 결혼생활은 마침표가 찍혔습니다. 이후 그녀는 40년을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연주자로서 남편 슈만의 곡들을 출판하고 알리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슈만의 곡들은 그 누구보다 클라라에 의해 가장 아름답게 구현되었습니다.
 

‘그의 음악을 연주할 때 난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내 온몸은 그의 음악 안에서 녹아내리는 듯하다.’

클라라는 슈만과의 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음악 속에서 그리운 남편을 만나곤 했습니다.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 순간에도 그녀는 손자가 연주하는 남편 슈만의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성공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클라라는 평생 1,300여회의 연주를 했으며, 66곡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음악가가 아닌 슈만의 아내로서 설명될 때가 많습니다. 또는 음악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여자 주인공 정도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혹자는 이야기합니다. 만일 그녀가 슈만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회자될 수 있었을까. 

클라라가 작곡가로서 주목받게 된 데에는 여성 음악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남긴 곡들이 인정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결혼 전 슈만에 대한 사랑을 담아 작곡한 <3 Romances, Op.11>(3개의 로망스) 는 슈만이 감동 받아 적극적으로 출판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1853년 작곡한 바이올린을 위한 3개의 로망스 <Three Romances for Violin and Piano, Op. 22>도 많은 극찬을 받았는데, 한 영국의 일간지에서는 클라라의 작품이 남편 슈만보다 낮게 평가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클라라는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관객들에게 사랑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 같은 음악가들에게도 존경을 받은 여성 음악가였습니다. 

클라라뿐만 아니라 음악사에는 훌륭한 여성 음악인들이 유리천장을 뚫고자 노력했던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힐데가르트 폰 빙겐(Hildegard von Bingen, 1098-117910)은 수녀로서 70여편의 예배음악을 작곡했고, 음악에 드라마적 요소를 삽입한 시도를 최초로 한 작곡가였습니다. 프란체스카 카치니(Francesca Caccini, 1587-1640)는 여성으로서 최초로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멘델스존의 누나인 파니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작곡가로서 인정받았던 클라라도 결혼 후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작곡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는 작곡가가 될 수 없는데 왜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녀의 일기는 시대가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관습과 제약, 그리고 특혜와 차별 뒤로 여성 작곡가들은 잊혀짐을 당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성공한 누군가를 보며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성공의 자리까지 가기 위해 노력하고 겪어야 했던 힘든 시간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또는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포기하기도 합니다. 클라라를 비롯한 여성 음악가들은 위대한 인물로서 남게 되었지만, 그 당시 남성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이름이 남겨질 것을 기대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허락되지 않는 것에 도전한다는 것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길을 내 주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그 발자국을 보며 용기 내어 걸어갈 수 있습니다.

클라라의 삶은 이후 여성 음악가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본이 되어주었습니다. 클라라는 슈만의 아내여서가 아니라 클라라 자체로 빛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를 보며 나의 삶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본이 되어줄 수 있는 길을 걷고 있는가. 내 인생을 바쳐 사랑할 무언가가 있는가. 이제는 클래식 작곡가를 생각할 때 그녀의 이름이 함께 떠오를 것 같지 않으신가요...

>>음악 들어보기<<
  <3 Romances, Op.11> 3개의 로망스
 <Three Romances for Violin and Piano, Op. 22> 바이올린을 위한 3개의 로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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