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교황청 국제신학위원)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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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사회에서 ‘치유’(healing)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을 반영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하였다.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이룩된 현대 디지털(digital) 문명의 기능적 효율성과 편안함의 이면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소외되고 비인간화됨을 체험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은 과학기술 문명의 물질적이고 가시적 성취를 통해 많은 안락한 혜택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그 어떤 정서적, 정신적, 영적 공허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이가 이러한 위험에 빠져 삶의 존엄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서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으로 바뀌어가기도 한다. 또한 여러 측면에서 ‘상처 받기 쉬운’(vulnerable) 상태가 됨을 느끼기에, 이에 대한 치유를 갈망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사회심리학적 맥락 및 정서적-영적인 맥락에서,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감과 외로움 속에서 방황하며 치유를 갈구한다.

특히 2020년 초부터 지금껏 2년 이상 지속되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전 지구적 어려움 속에서, 많은 이들이 이른바 ‘코로나 블루’(Corona Blue)로 인해 우울함을 체험하고 ‘코로나 레드’(Corona Red)로 인해 분노감을 느끼며, 내적인 외로움과 상처 속에 더욱더 치유를 염원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치유는 긍정적인 면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일, 모든 현상, 모든 장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빛과 그늘, 양지와 음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 중 어느 쪽을 바라볼 것인가는 바로 내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체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의 빛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현상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밝은 면을 찾아서 보게 될 것이고, 어둡고 부정적인 체험을 한 사람은 다른 일에서도 어두운 면을 우선적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정 안에서 사랑을 체험한 아이는 밖에 나가서도 사랑을 나누고 전달할 것이며, 반면에 증오를 체험한 아이는 다른 일에서도 미움의 동기를 먼저 발견할 것이다. 어느 쪽에 나의 시선을 두는가에 따라서,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기쁨과 은총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고통과 저주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내 자신의 고통스러운 체험 속에만 매몰되어 그저 좌절해버릴 수도 있지만, 시선을 돌려 우리 주변 다른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게 된다면, 바로 거기에서 치유의 신비로운 힘이 작동하게 된다. 내가 겪는 시련의 체험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치유함으로써 치유를 받게 되는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고정되어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존재’(human being)는 또한 ‘되어가는 인간’(human becoming)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신(mind)과 마음(heart)과 영(spirit) 안에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존엄성(dignity)을 깨달아나간다는 점에서, 인간은 곧 ‘되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와 ‘행동’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고통 받는 타인의 치유를 위한 우리의 돌봄 ‘행위’는 곧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선한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을 돕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행동은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으로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 규정해나가기도 한다. 인간은 고정되지 않고 삶을 통해 점차 형성되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치유를 위한 우리의 선한 돌봄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다시 새롭게 치유되고 변화되어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타인을 향한 치유 활동은 타인을 도와 위안을 전달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치유해 성장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승불교 수행의 이상으로서 ‘이타자리’(利他自利) 개념이 제시된다. 지혜와 자비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보살은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이로움과(自利)과 타인의 이로움(利他)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깨달음의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성불(成佛)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여 함께 열반에 들기 위함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가톨릭 교회의 프란치스코 교황(재위 2013-)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성덕(holiness)”이라고 역설한다. 신약성경 로마서 12장 15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이처럼 치유를 위한 상호관계성 안에서 새로이 발견되고 실현되는 인격성은 인간 본성의 가장 고귀하고 심오한 차원을 드러낸다.

만일 이러한 치유의 관계적 문화가 사회적 차원에로 적용되어 확장된다면,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말한 바와 같은 ‘소유양식’(to have)으로부터 ‘존재양식’(to be)으로의 전이를 가능케 하여, 사회 공동체적 화해와 치유의 새로운 가능성과 전망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전 지구적인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치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마음’의 치유라 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인간 치유의 핵심 열쇠는 기술적인 차원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의 회복에 있다.

우리는 괴로움과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며 그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전해주고자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고귀한 삶의 의미와 존엄성을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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