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양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수, 교황청 국제신학위원)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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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 부터 '헬스케어영성'은 '박준양 교수의 인문학 산책'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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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뷰티풀 마인드」(A Beautiful Mind, 2001)라는 영화를 매우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실제 인물의 실제 있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는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대학교의 교수인 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Nash, 1928-2015) 박사가 자신의 정신질환을 극복하고서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겨 마침내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내쉬 박사가 이처럼 정신질환이라는 큰 장애물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 알리시아(Alicia)의 헌신적인 도움 때문이었다. 알리시아는 온갖 정성과 인내를 다해 내쉬 박사를 계속 내조해왔으나, 거듭 재발되는 남편의 정신질환 앞에서 어느 날 심히 절망하게 된다. 정신 치료를 위한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내쉬 박사가 다시 심하게 발작하였던 어느 날 저녁, 알리시아는 울부짖으며 이렇게 소리친다. “난 이제 뭔가 특별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만 해요”(I need to believe that something extraordinary is possible).

이는 필자가 기억하는 이 영화의 명대사이다. 그동안 끝없는 사랑과 정성으로 남편인 내쉬 박사를 내조해 왔지만, 알리시아도 인간인지라 악몽과도 같이 계속 재발되는 정신질환 앞에서 이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자신의 무력함과 한계를 절절히 느끼면서 뭔가 특별한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싶다고 울부짖는다.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만 이 절망스러운 좌절로부터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 여정에서도 때로는 이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순간을 체험하지 않는가? 누구에게나 이런 체험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울음과 울부짖음을 눈앞에서 보고 들으며 내쉬 박사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다잡아 치료에 임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병마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학계에서 큰 성취를 이루어내고, 마침내 노벨 경제학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그래서 내쉬 박사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Stockholm)에서 영예의 노벨상을 받은 후,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상 기념 연설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콘서트홀에서 많은 내빈들 속에 함께 앉아 있는 아내 알리시아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하지만 지금껏 사랑과 인내로써 자신을 지지하고 격려해준 아내에게 이 모든 기쁨과 영광을 바친다고 내쉬 박사가 말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화면에는 텅 비어 있는 객석에 혼자 앉아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이것은 이 영화의 감독편집판(director’s cut)에 수록된 장면이다. 아무리 수많은 인파 속에 파묻혀 있다 하더라도, 내가 깊이 사랑하고 나를 깊이 사랑하기에 참으로 의미 있는 단 한 사람의 모습만이 마치 홀로 있는 양 내 시야를 가득 채우게 되는 현상을 이 영화의 감독은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십리 밖에서도 보인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이는 결국 사랑을 통한 궁극적 의미 체험에 관한 역동적 메시지인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메시지는 프랑스의 비행조종사이자 소설가였던 앙투완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의 대표작 어린 왕자(Le Petit Prince)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생텍쥐페리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정찰 비행을 하다 독일군 전투기에 의해 격추됨으로써 마흔 네 살의 생을 마감하기 바로 1년 전인 1943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여기에서 생텍쥐페리는 사랑을 통한 의미 체험에 관하여 말한다. 두 인격체의 관계에서 아직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를 때에는 상대방이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만남의 관계성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잘 알게 되어 ‘길들이게’ 된다면, 이제는 상대방이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를 통해서 제시된다.

다음은 어린 왕자에게 하는 여우의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너는 아직 수없이 많은 어린 소년들 중의 하나일 뿐이야. 나에게는 네가 필요하지 않지. 그리고 너에게도 역시 내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너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수없이 많은 여우들 중의 하나일 뿐일 테니까. 그러나 만약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지.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나 역시 너에게 이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여우가 되는 거야.”(김남주 옮김, 대원사, 1990, 86쪽)

진정한 사랑은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참으로 의미 있는 유일한 존재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의 고귀한 특권이며 또한 막중한 책임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랑할 수 있기에 삶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이 세상에 더욱 많아지기를 꿈꾸어본다. 그래서 이 세상이 위기의 어두움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진정한 사랑은 깊은 밤을 뚫고 지나가는 한줄기 아름다운 별빛처럼 우리를 비추어줄 것이다.

출처 : 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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