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양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교황청 국제신학위원)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많은 분들이 예전에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O. Henry, 1862-1910)의 1905년 작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를 읽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죽음을 앞둔 환자가 느끼는 슬픔과 절망감이 잘 묘사된다.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 사는 젊은 화가인 존시(Johnsy)는 폐렴에 걸려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녀가 삶에 대한 의욕과 희망을 상실해 병세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존시는 자신의 방 창문 너머 벽에 붙어있는 담쟁이덩굴 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져가는 것을 보면서, 마침내 그 마지막 남은 잎마저 다 떨어질 때 자신의 생명도 다할 거라고 생각하며 절망한다.

그 아래층에 사는 노인 화가 베어만(Behrman)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존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밤사이에 몰래 담쟁이덩굴 잎새 하나를 벽에 그린다. 심한 비바람이 불었던 그 밤을 지나 아침이 되어서도 마지막 잎새가 하나 남아 있는 것을 본 존시는 마침내 삶에 대한 의욕과 희망을 회복해 서서히 건강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비바람 속에 밤새 사다리를 타고서 벽에 잎새 그림을 그렸던 베어만 노인은 급성 폐렴에 걸려 숨지게 된다.
존시가 절망하며 했던 말, “담쟁이덩굴에 붙은 그 마지막 잎새 하나가 떨어질 때 나도 세상을 떠나가야 해.”(Leaves. On the ivy vine. When the last one falls I must go, too) 하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감정과 느낌, 그 두려움과 절망감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겨울이 지나고 새 봄이 오는 것을 보기 전에 저는 떠나겠지요...” 하고 체념하는 낙담 가득한 말을 이 단계에 있는 환자들로부터 직접 들은 적도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어느 늦은 가을날, 홀로 산행을 하던 중에 『마지막 잎새』에서 존시가 했던 이 말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긴 적이 있다.
필자는 산에 가는 것을 참 좋아한다. 산에 가면 일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잊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생명의 충만한 기운을 얻게 된다. 곳곳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봄의 산이나 사방이 온통 푸르기만 한 여름 산, 그리고 아름답게 단풍이 물든 가을 산과 모든 것이 하얗게 눈에 뒤덮인 겨울 산 모두 각기 나름대로의 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11월 중순 늦가을 산의 모습이다.
화려하게 물들었던 나뭇잎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가며 빈 나뭇가지 사이로 사방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래서 단풍 구경을 나왔던 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모두 돌아가 그 허전한 자취가 느껴질 때, 산은 참으로 적막하고 고요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비어 있는 그대로의 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산을 좋아하는 여러 사람들이, 이때의 산이 가장 아름답다고들 말한다.
특히, 이즈음의 산에 가면 빈 나뭇가지 사이로 먼 거리의 풍경이 잘 보이게 된다. 이때의 산은 자신의 빈 모습 안에서 모든 것을 버리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을 품을 줄 아는 고독과 관용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정녕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를 비울 때, 우리가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늦가을의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언젠가 이 무렵에 어느 산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차가운 대기 속에 홀로 산행을 하다가 어느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 바위 앞의 나무를 바라보았는데, 그 나뭇가지에 나뭇잎들 몇 개만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갑자기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벽에 남은 잎들을 바라보며 존시가 느꼈던 두려움과 절망감이 내게도 전해져오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필자는 그 모습에서 매우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처절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서로 대화하고 통교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이별을 앞두고 서로에게 속삭인다. 아마도 내일이면 저 나뭇잎들은 모두 떨어져, 그들은 그렇게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이별의 두려움마저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나누며 이야기하고 있는 이 마지막 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내일이면 서로 헤어질 것을 알고 있는 그만큼, 그들은 더 깊이 있게 서로를 사랑하며 애틋한 통교를 나누고 있다.
내일 서로의 길을 걸어가며 다시는 만날 수 없이 이별하게 될지라도, 지금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게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하는 이 시간 안에서 영원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체험과도 같다.
이처럼, 늦가을에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곧 다가올 이별을 앞두고서 이루는 통교는, 죽음을 앞둔 환자와 그 가족들이 나누게 되는 마지막 시간의 체험을 연상시킨다. 그 마지막 시간은 그들에게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이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순간들이다.
이렇게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시간 동안 그들은 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나누게 된다. 이는 아직 서로 용서하지 못했던 것들을 용서하는 화해의 시간이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하는 위로의 시간이다.
또한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 특히 감추어져 있던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게 되는 진실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 인간의 마지막 시간에 이루어지는 영적 통교,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진실한 인격적 유대감의 형성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소중한 체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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