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ㅣ 정정석 수의사

책 ‘어쩌다 보니 열혈 수의사’ 지음
대한수의사회 제공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5년 전에 전남 구례로 주말여행을 갔다.

딸이 만으로 갓 한 살이 넘었을 무렵이었고,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생명과 인생이 참 오묘한 것이 딸만 하나 키우며 살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고, 전혀 예비되지 않았던 또 다른 생명이 돌연 태어나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니 신비롭고 묘하다. 딸이 5살 되었을 무렵 동생을 낳아달라고 매일 같이 울어댔다. 셋이서 일요일에 마실을 나가서 집에 돌아오면 딸내미는 집 앞에서 들어가기 싫다고 떼를 쓰곤했다. 집에 가면 심심하고 외롭단 핑계로 부부를 코너로 몰아 아웃복싱을 구사했던 거였다. 어른이 채워주지 못하는 나이 또래들만의 눈높이와 척하면 척하는 소통이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우린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울 생각이었는데 딸의 성화로 접었던 마음을 고쳐먹고 둘째를 계획했다. 회고해봐도 참으로 잘한 결정이었다. 

여튼 쪼꼬미 어린 딸을 데리고 여행을 갔다. 여행이라 해봤자 토요일 오후 5시까지 진료를 보고 급히 출발하면 밤 9시경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저녁에 한 상 차려 먹고 술 한 잔 하면서 오붓한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펜션 퇴실할 때까지 오전을 빠듯하게 보내고 주변 관광지 한 곳 쯤 눈 호강 하고 상경하는 것이 우리들의 짧은 코스였다. 그날도 일요일 아침 일찍 구경을 나갔다가 11시쯤 퇴실할 때 귀가해서 서둘러 방을 정리했다. 캐리어 하나에 모든 짐이 잔뜩 있었는데 당시엔 아이가 어려서 아기용품이 꽤 있었다. 젖병, 분유, 속옷, 겉옷, 유모차 등 한가득이었다. 베이비를 데리고 한번 이동할라치면 한 짐이 되어 트렁크를 꽉 채워야해서 어딘가로 움직이는 것조차 녹록지 않았다.

방을 비울 시간이 촉박해서 후다닥 정리를 하고 캐리어에 때려 넣었다. 도로에 차가 막힐 시간이라서 경기도까지 올라가려면 서둘러야했다. 상행선에서 차가 밀리면 정말 대책이 없으니깐.

대충 방 정리를 하고 갈 채비를 했다. 딸내미가 어리니까 아내가 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내가 주로 물건 정리를 했고 숙달된 조교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정리를 후딱 끝내버렸다. 왔던 모습처럼 방을 깨끗이 치우고 큰 캐리어 하나에 가져온 오만가지 물건을 때려박았다. 

아내 : 정리 끝났으면 어서 가자! 시간이 없어. 허리업! 막힐 시간이야.

아내는 카시트에 아이를 앉히고 조수석에 앉아서 큰소리로 외쳤다. 

나 : 응! 마지막으로 두고 온 물건이 없나 확인하고 올게. 

나는 우리가 묵었던 방으로 들어가서 두리번거리며 혹시나 놔두고 온 물건이 없을까 매의 눈으로 확인했다. 서랍도 열어보고, 샤워실에 가서 샴푸나 칫솔, 2G 핸드폰 충전기(양쪽을 눌러서 잭을 연결하는 추억의 구닥다리)도 있는지 면밀히 살폈다. 사소한 것을 놔두고 와버리면 그것처럼 짜증나고 황당한 게 없으니 보고 또 보며 체크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안 챙기고 두고 온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차에 올랐다. 아내는 흘린 물건이 없이 구석구석 확인했냐고 재차 물었고 나는 믿음의 눈빛을 쏘며 당당하게 턱을 위아래로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끝발 날렸던 2002년식 아반테XD 골드를 힘차게 몰고서 급하게 구례를 떠났다. 호남선 고속도로에 합류하여 신나게 달렸지만 막힐 조짐이 들어서 서해안 고속도로로 갈아타서 태안, 평택 쪽으로 우회도로를 선택했다. 그렇지만 이쪽도 이미 상당히 차량이 많아져서 뻥 뚫리는 맛은 이미 물 건너 가버렸다. 

한 3시간을 달렸나 잘은 기억은 안 나지만 겸사겸사 행담도 휴게소에 멈춰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왜냐하면 곤히 자던 아이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는데 잠에서 깬 듯했고, 그 이유가 배가 고파서 그럴지도 모르니 신속하게 분유를 먹여야 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우리 볼 일도 볼 겸 휴게소에 들르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 휴게소는 진입이 간단하지가 않았는데 뺑뺑 돌아서 접근해야하며 쇼핑몰 같은 시설이 자리하고 있어 범상치가 않음을 느꼈다. 처음 들어가 본 곳이라 좀 낯설어서 사주경계를 하면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그렇지만 뻥 뚫린 주차장은 시원넓직해서 맘에 들었다. 사면이 바닷가인지라 바람이 쾌청하게 불어왔고 휴게소 특유의 생동감이 넘쳐서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주차를 하려고 천천히 움직이니 우리 딸이 여지없이 눈을 번쩍 뜨면서 완전히 깨버렸다. 갓난아이들이 잠에서 깨면 정말 엄마들이 애를 많이 먹는다. 쉼 없이 울면서 짜증을 내거나 온몸을 비틀기가 일쑤인데 그건 욕구의 반영이므로 당연하지만 의사소통이 안되니 무엇이 불만인지, 무엇 때문에 이리 심통이 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진장 칭얼대면 어르고 달래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았다. 걔 중에는 몸이 아파서 컨디션 난조로 우는 일도 있으니 단순하게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아내는 빨리 젖병을 물려서 허기를 달래줘야겠다고 말했다. 

아내 : 빨리 분유랑 보온병, 젖병 준비해줘, 내가 물릴께요. 

평상시 공갈 젖꼭지를 잘 물고 있어서 수월한 편이었지만 진짜 배고플 땐 인정사정없이 울어재끼니까 민첩한 동작으로 아이 밥을 대령해야했다. 나는 차를 멈추고 문을 따고 내려서 트렁크가 있는 후미로 갔다. 그리고 전동이 아닌 수동 트렁크를 힘차게 열어서 아빠의 본분에 충실했다. 그러나 나는 돼지바처럼 꽁꽁 얼어서 옴짝달싹할 수 없어졌다. 그야말로 냉동인간이 그냥 공짜로 가능했던 순간이었다.
.
.
.
.
.
트렁크 안에 있어야할 트렁크(캐리어)가 없었다. 트렁크는 없었고 차량 트렁크와 아빠 트렁크 차림만 존재했다. 바지가 벗겨진 것처럼 하반신에 서늘한 비수가 날아왔다. 펜션에서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지만 정작 모든 살림이 다 들어있는 캐리어를 방 한가운데 두고 와버렸다. 캐리어를 트렁크에 챙긴 줄로만 알고 그 큰 물건을 간과하고 빈방에 덩그러니 두고 와버렸던 거였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말도 안 되는 치명적인 실수와 착오에 뒷목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아내 :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보온병에 물이 없어?

나 : 그게....

어버버를 시전하자 아내가 하차감을 만끽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그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혼성트리오 쿨의 운명’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말았다. 면목이 없어서 미칠 것만 같아 당시엔 풍성했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내 : 캐리어 어디 있어?

나 : 달랑 그것뿐인데 그것만 안 가져왔나봐. 나 미친 것 같아.

아내 : 헐. 이럴 수가! 

나 : 서두르다가 이미 실어놓은 줄 알고 전혀 신경을 못 썼나봐. 어떡하지?!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놔두고 쓸데없이 몇 번을 다시 들어가서 잔잔바리를 확인했다니.. 너무 황당했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나의 치명적인 잘못이어서 할 말을 잃었다. 아이는 배고프다고 울기 시작했고 그 좋던 날씨는 갑자기 흐려지면서 찬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맘대로 이리저리 가지고 놀았다. 

아내는 말잇못 벙쪄서 이마에 손만 올리고 아무 말을 못했다. 복기 해봐도 내가 실어뒀든지, 아내가 실었든지 했겠지하며 자만했고 방 가운데 있던 캐리어를 내팽개치고 방탈출을 시도했다니 염치가 없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어 눈물을 찔끔거렸다. 황당무계한 이 사태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나는 펜션으로 즉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바로 연결되었지만, 주인 아주머니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이벤트여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사장님 : 방 청소하려고 들어갔더니 엄청 큰 캐리어가 방 한가운데 있는 거예요.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더라구요. 애기 물건이랑 다 여기 들었을 텐데 괜찮아요??

나 : 사장님, 이를 어떡하죠? 애기 분유가 없어서 지금 휴게소에서 굶고 있어요. 죄송하지만 빠른 시일 내로 착불로 보내주시겠어요?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정말 부끄럽네요. 

사장님 :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것 같구 그래요. 너무 낙담 말고 며칠 걸릴 테니까 기다려봐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분실물이 무사함을 체크하니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결국 우린 그 휴게소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다시 채비해서 집으로 왔던 것 같다. 쇼핑몰로 달려갔지만, 유아용품은 미비해서 헛수고였기에. 딸내미는 허기에 울며불며 야단이어서 부모의 가슴은 찢어졌다. 특히 내 가슴이 더....

늦은 저녁 집에 도착해서 부랴부랴 이마트에 가서 아이 물건을 급한 대로 사야했다. 집에도 있었지만 번갈아가며 소독해서 써야하니 여분이 필요했다. 우리 옷가지야 며칠 기다리면 되는 불편이라 괜찮았지만, 유아용품은 핵노답이라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아내가 나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구박하진 않았지만 마치 귀신에 홀린 듯 그 커다란 물체를 안 챙겼다니 정말 이해가 안 갔다. 며칠 후 문제의 분실 캐리어가 도착해서 나를 진정 부끄럽게 만들었고, 진짜 어이없다며 아내도 한참 웃었다. 그 후 여행을 가면 캐리어가 잘 있는지 트렁크를 열어서 자주 확인하고 수 차례 방에 들어가 또 두고 온 게 없는지 자주 체크하는 버릇이 생겼다. 칫솔, 충전기, 이런 것들이 제일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인데 그렇게도 챙긴다고 챙기면서 집에 와보면 정작 놔두고 온 경우가 있으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지만, 이상하게 그럴 때가 있다. 귀신 속담이 많은 걸 보니 정말로 귀신이 진짜 있는 건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아침에 큰 것들은 아내가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고, 아내는 아기 띠를 하고 방을 나섰고, 내가 입이 벌려진 캐리어에 나머지 물건들을 챙긴 후, 자꾸(자크)를 잠궈서 방 한가운데 세워두고 숙소를 나와서 아이를 아내에게 건네받아 카시트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매주고 다시 방에 들어와 못 챙긴 것을 챙기려 방방곡곡 살펴보다가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끌고 나와서 트렁크에 실어야했는데, 두리번거리다가 정작 제일 중요한 여행가방을 안 챙기고 퇴실한 것 같았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으로 어련히 실었겠지 생각했던 오만한 자만이 불러온 창피한 불찰이었다. 수줍음은 오로지 내 몫.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유리병과 자갈과 모래를 주면서 병을 채워보라는 과제를 주었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모래를 곱게 채우며 가득 채우는 것에만 혈안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교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자갈을 먼저 넣고 빈 공간을 모래로 채우면 순서가 맞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실험을 시켜본 것이라고 했다.

교수 : 오늘의 과제는 유리병을 가득 채우는 것에 목표가 있지 않다. 제균들! 나는 너희들에게 이걸 말해주고 싶었다. 인생을 살면서 고민과 고뇌로 허덕이며 방황할 때, 오늘의 실험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실험을 해보았다. 삶에서 가끔 일이 안 풀릴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땐 이걸 상기해라!

큰 돌로 먼저 채우고 그 빈틈을 모래로 메꾸는 것과 같이 우선 큰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부수적인 것을 그 다음에 풀어라. 중요한 것을 먼저 해결하면 소소한 것들도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것을 명심하자.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큰 덩어리부터 정리하다보면 답보상태가 해결되거나 산적한 고민이나 목적이 완수될 수 있음을 떠올려라!!

나는 큰 캐리어를 보지 못하고 작은 것에 천착했다. 행담도 휴게소의 멘붕은 나만의 흑역사가 분명하다. 이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프로토콜이나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서 지키는 것 같다. 차량 트렁크의 트렁크 순삭 사건은 드렁큰이 아니고서야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일 것이다. 

K2 김성면 님이 부릅니다. # 잃어버린 너 #

관련기사

저작권자 © 힐링앤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