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우치공원관리사업소
최종욱수의사 ㅣ 대수회 동물칼럼니스트

[대한수의사회 제공. 힐링앤라이프 편집]

▲ 사진 = 대한수의사회 제공
▲ 사진 = 대한수의사회 제공

아침에 백사슴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는 긴급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갔다. 사람이 접근해도 눈만 두리번거릴 뿐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별로 가망이 없어 보였다. 뿔이 길게 자란 4년생 숫사슴인데 지금이 한창 번식철(가을)이니 아마 다른 힘센 숫사슴에게 들이받힌 모양이었다.

학생 때 개 싸움장(투견장)에 수의사 선배 따라 우연히 한번 간 적이 있다. 개 싸움에서 물린 개는 그리 크게 외상이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허덕이다 죽기도 하는데, 이걸 부검해 보면 흉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슴도 마찬가지로 둔탁한 뿔로 바치면 외부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다가 내부적으론 피부부터 근육까지 출혈이 돼 있고 심한 경우 충격으로 인해 갈비뼈 사이가 구멍이 뚫려 있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격리실로 옮기고 즉시 저농도의 포도당과 전해질이 들어있는 수액요법을 실시했다. 혈관을 찾아야 하는 데 보통 경정맥의 위치가 목의 부드럽게 파진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데 탈수가 심한지 혈관을 한참 찾다 보니 기관지 근육 위로 올라붙어 있었다. 탈진 상태일 경우 수액을 하는 건 치료의 기본에 해당한다. 가끔 수분 보충만으로 기적적인 회복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고 수액을 꽂음으로써 혈관으로 약물을 집어넣을 수 있는 길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다. 

한동안 수액이 들어가자 약간 기운이 드는지 고개를 들고 약하게 반항까지 해댔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것 같으니 오후에 다시 치료하기로 하고 편안한 자세로 앉혀 놓은 채 일단 철수를 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바로 올라와 보니 치료의 보람도 없이 그대로 죽어있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요행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죽음 앞에서 한 가닥 희망이라도 붙들고 싶은 게 또한 수의사나 의사들의 심정이기도 하다.

죽은 걸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연구소로 옮겨 부검을 실시했다. 역시 갈비뼈 양쪽으로 구멍이 나 있었고 피하 조직 아래로는 검붉게 멍들어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심장을 감싸는 심낭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이를 보았을 때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이며 이를 불러온 요인은 갈비뼈 양쪽의 강한 타박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흉강 부위의 부검이 끝나고 이번엔 부로 내려갔다. 어차피 복부 장기는 이런 경우 지극히 정상적이라 부검의 의미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순서대로 진행한다. 그런데 위장을 만져보니 안에 무언가 딱딱하고 큰 덩어리가 만져졌다. 초식동물들의 위장은 통상 고무처럼 말랑말랑하다. 즉시 그 부위를 절개해 보았더니 커다란 비닐 끈 뭉치가 잇달아 나왔다. 도저히 먹었다고는 상상이 안 가는 마치 누가 수술해서 넣은 것처럼 크고 많은 양이었다. 가끔 사슴이 과자 봉지 같은 걸 씹는 걸 빼앗은 적은 있는데 그것을 삼키는 줄은 정말 몰랐다. 

▲ 사진 = 대한수의사회 제공
▲ 사진 = 대한수의사회 제공

 

이렇게 되면 죽음의 원인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 이 사슴은 유난히 비닐류를 좋아해서 보이는 데로 씹어 삼켰다. 그리고 위장에 비닐 뭉치가 쌓이면서 만성 소화불량을 일으켰고 바로 몸의 쇠약으로 이어졌다. 쇠약한 개체는 동종의 무리들에게 집단 따돌림과 구타를 당하고 종국에 심장마비로 이어져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좀 더 구체적인 원인은 이 사슴에게 끈 뭉치를 제공한 사람들이다. 사육사가 될 수도 있고 관람객이 될 수도 있다. 아니 감시를 소홀히 한 내 탓일 수도 있다. 작은 일 하나가 일파만파로 확대되어 전 지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카오스이론처럼, 동물들 특히 갇힌 공간에 사는 동물들에게 약간의 부주의나 매우 작은 변화 하나만으로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서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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