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정정석 수의사
대한수의사회 제공

전역하고 한 달 놀다가 가방 하나 짊어지고 무작정 상경하여 2002년 1월부터 현재까지 거의 쉼 없이 일하고 있다. 심신이 지쳤는지 그냥 오늘은 그 어떤 날보다 출근하기 싫어졌다. 난 그저 보통의 인간인지라 감정의 기복도 있고, 바이오리듬의 편차도 있기 때문에 꼼짝도 하기 싫은 날이 존재한다. 즉 게으르고 싶을 때가 가끔씩 불쑥 밤손님처럼 찾아오곤 한다. 방학이나 연차, 안식년 그런 것은 나에겐 뜬구름 잡는 언감생심이자 그림의 떡 넘사벽이니까. 

 

유독 오늘 아침은 따뜻한 전기장판에 등을 지지며 뒹굴뒹굴 놀고 싶어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멍 때리는 그 시간이 너무 좋고 소중해서 야속한 핸드폰 시간만 자꾸 쳐다봤다. 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공허함은 밀물처럼 철썩 내 발가락을 간지럽히며 현실 자각의 타임을 강조했다.

 

빨리 일어나! 돈 벌러 가야쥐.

까불다가 8시 무렵에 느그적 거리며 일어났다. 정말 일하기 싫다~~! 속으로 외치며

 ‘내가 왜 사는가, 대체 무얼 위해 사는 걸까, 돈은 벌어 과연 무엇을 하려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며 힘없이 출근 준비를 했다. 뚜벅뚜벅 걸어 동물병원의 문을 따고 안온한 하루를 시작했다.
날씨가 추우면 이런 잡생각이 많이 들고 조울증이 찾아온다. 몸이 움츠러들면 마음도 함께 응축되는 것 같다. 하여 신명나기보다는 어깨가 좁아지고 발끝의 저릿한 냉기가 내내 불쾌감을 주어 온종일 신경이 쓰인다.

그래도 시나브로 봄은 오는 것 같다.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잠시 낮에 산책을 나가보면 햇볕이 은근 따사롭고 차렵이불처럼 포근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나는 공상에 빠지며 벅찬 일조량의 망중한을 즐긴다. 저 멀리 태양에서 출발한 광자(파동이자 에너지)가 가쁜 숨을 쉬며 나의 피부에 스며든다. 그럼 나는 콜레스테롤을 내어주고 광자와의 급만남을 주선한다. 그렇게 둘은 격하게 콜라보를 이뤄 비타민D를 합성해낸다. 이가 튼튼, 뼈가 튼튼하라는 태양의 혜량에 가슴이 절로 웅장해진다. 저 머나먼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로 흡수된 것을 광합성에서 문득 깨닫는다.

광대무변의 우주와 나는 하나가 된다. 내가 곧 우주. 

무슨 계절을 특히 더 좋아하시나요. 나는 4계절 중에 어떤 계절을 가장 사랑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단연코 여름이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봄과 가을도 맘에 든다. 한데 요즘은 지구온난화 때문인지 봄이 짧아진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3월과 4월에 삼한사온으로 와리가리 밍기적거리다가 봄은 5월에 반짝하고 여름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줘버린다. 5월만 되어도 햇살이 따갑고 반소매를 입지 않으면 땀이 차서 생활하기 영 불편해지니 말이다.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렇지만 봄은 모든 생명들에게 시작과 기회를 부여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새단장한 꽃밭에서는 새싹이 시나브로 자라나고 신록의 색깔이 참으로 때깔이 곱다. 벚꽃은 뭐가 그리 마음이 급한지 후딱 꽃을 피워 봄을 예찬하고 바람에 나부끼는 꽃비로 대장관을 연출한다. 봄의 백미는 그래서 벚꽃이 아닐는지.

봄은 영어로 스프링, 즉 도약의 계절이다. 

차가움을 떨쳐내고 온기를 머금어 저 높이 뛰어오르는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새 생명이 움트고 1년 살림살이를 준비하는 생명들의 노래가 귓가에 들여온다. 꽃향기를 기본 장착한 봄바람에선 꽃내음이 물씬 풍겨오고 우리들은 젊음을 발산하며 은밀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젊음의 계절은 그야말로 여름이 그 절정이지만 모든 것엔 그 시작과 과정이 있어 가능한 일이기에 봄은 청춘과 생명 활동의 토대이자 소담스런 그릇이다.

진달래꽃 흐드러진 꽃다지를 거니는 상상을 하여본다. 

한결 몸이 가볍고 싱그러움에 들떠 마음이 싱숭생숭 여간 벌렁대지 않는다. 개울가의 개구리는 긴긴 잠에서 깨어나서 기지개를 펴고, 살얼음이 살짝 낀 시냇물은 음량을 키우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만 간다. 도시화의 획책으로 도시 생활은 자연과 멀어져 언젠가부터 산과 들을 동떨어지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도로의 가로수에도 봄은 찾아오지만 진정으로 봄을 만끽하려면 몸소 자연을 만나러 부지런을 떨며 찾아가야 한다. 그 곳에 가면 칠흑의 바다 빛깔이 은근히 엷게 변함을 느끼게 되고 나를 감싸는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나무와 들풀들의 짙푸른 엽록소에서 왕성한 일조권 쟁취를 체험할 수 있다. 약동하는 생명들은 그 나름대로 각각의 계절을 찬미하며 조용히 스스로의 삶을 살아간다.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하지만 자연엔 ‘성함"(정성)이 있어 위대하고 경이롭다. 하찮은 것들이 전연 없고 다들 개성을 뽐내며 주어진 운명을 진지하게 살아낸다. 반딧불이는 불닭볶음면을 먹었는지 엉덩이에 반짝 불이 나고, 쇠똥구리는 힘겹게 똥을 굴리며 기똥차게 예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고, 노래하는 작은 새들은 내집마련의 꿈을 위하여 둥지를 만드는데 여념이 없이 최선을 다한다. 나무 한 그루도 흔한 잡초조차 나고 자람에 진정성이 있다. 더디거나 빠른 성장에는 깊은 뜻이 있고 존재와 모양에 그 이유가 분명 있다. 조건이 열악하면 한해를 거르고 이듬해를 기약하며 안빈낙도를 실천한다.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전혀 없고 모든 것엔 원인과 결과가 명명백백하다.
 
자연은 지성을 다하므로 영적인 지엄함이 있고 인간의 귀감이다. 귀찮음과 게으름이 없이 매사에 정성을 다할 뿐이다. 그렇다고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을 수렴팽창하며 우주를 노래할 뿐이다. 그들에겐 번뇌란 설 자리가 없다. 사치도 없고 망설임조차 없다. 그냥 세상에 나온 것엔 무릇 이유가 있겠거니 여기며 제 뜻대로 살아간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강과 들, 동식물들 뿐만 아니라 돌멩이 하나에도 변화무쌍함이 깃들어 있다. 그야말로 역동적으로 존재했다가 소멸한다.
 
계절은 돌고 돌아 자연과 순리대로 합을 맞추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말없이 응원하고 격려한다. 여름은 화려강산, 가을은 결실과 성숙, 겨울은 휴식과 기약 그리고 봄은 움틈과 시작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본격적인 생명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봄은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나날이다. 그것이 봄날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게으른 날의 푸념과 한가한 병원은 절묘하게 딱 맞아 떨어지며 스산하다. 점심을 후딱 먹고 정오의 햇살 산책을 다녀와야겠다. 

사뿐사뿐.

 BTS가 부릅니다. # 봄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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