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얼빈...안중근의사 기념관, 이토히로부미 저격장소, 자오린공원

김예채 컬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어른들을 위한 월간 인문학학습지 ‘한걸음’ 집필진

▲ 안중근의사 기념관. @김예채 칼럼니스트
▲ 안중근의사 기념관. @김예채 칼럼니스트

중국 옌지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4시간 남짓 달려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인데 그 자리에 기념관이 세워져 있어 찾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기념관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손도장, 흉상, 안중근의사가 의거를 결행하기까지 하얼빈에서 보낸 11일간의 행적, 각종 사료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로도 설명되어 있었고요. 또 기차 플랫폼 앞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도 표시되어 있었죠.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안중근의사와 이토히로부미의 거리가 매우 짧아 더 놀라게 되었습니다. 기념관을 둘러보다 그가 남긴 유언이 적힌 전시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가 동포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습니다. 동포들에게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여 독립을 이루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안중근 의사 앞에서 저는 한없이 부끄러워졌어요. 피할 수 없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을 자꾸 찌르는 것 같아 도망가고만 싶었습니다.
나의 안락한 젊음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은 채무감을 안겨주었어요.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라는 질문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자리. @김예채 칼럼니스트
▲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자리. @김예채 칼럼니스트

안중근 의사가 죽기 전, 어머니가 만들어 보내주신 수의를 입고 어딘가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 한 장을 본적이 있어요. 그의 눈빛에는 여러가지가 담겨있는 것 같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서려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단호하고 결연한 의지가 보이기도 했죠.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죽음 앞에서 초연하고 의연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으며, 다른 그 어떤 사진에서보다 밝고 빛나 보였죠.

죽음 앞에서도 조국이라는 대의만을 생각하며 초연하고 담담했던 안중근 의사를 보니 지금의 내가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자신의 삶을 뒤로 한 채 죽음까지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바쳤는데, 삶의 작은 문제 하나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대는 나.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못하고 손에 꼭 쥔 채로 아등바등 살아가려는 내 모습이 보였어요. 그들은 사랑하는 여인, 가족은 물론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는데 나는 당장 돈 문제, 일 문제, 사람들과의 어그러진 관계, 친한 친구와의 이별 하나 뛰어넘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비틀거리고 있었죠. 

그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지만 말을 아끼고 조국이라는 대업을 위한 유언을 남긴 것은 그만큼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던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의 유언에 빗대어 보았을 때, 나의 유언은 그저 한 사람의 작은 회개문 같이 느껴졌죠. 저는 안중근 의사의 유언 앞에서 내가 왜 이 땅에 존재하며, 무엇을 위해 일하고, 어떤 일에 나를 불태워 다른 곳을 밝힐 것인지 지금부터 고민하고 행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두렵고 어렵겠지만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것처럼이요. 시인 박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이 지금 제 마음속에 들어와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고 의연할 수 있었던 건 나처럼 당장 내 앞에 있는 작은 문제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크고 넓게 멀리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오래전부터 각오했기 때문이었겠죠.

안중근 기념관에서 나온 저는 쑹화 강 가까이에 있는 자오린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평소 시민들이 즐겨 찾는 안식처이고, 해마다 1월부터 2월까지 빙등제가 열려 이를 보기 위해 중국 전역의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죠. 

▲ 자오린공원. @김예채 칼럼니스트
▲ 자오린공원. @김예채 칼럼니스트

자오린 공원 안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비가 세워져 있는데, 유묵비에는 '청초당'이라는 글자와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청초당은 '못가에 파란 풀이 돋아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일제 강점기라는 암흑 속에도 못가에 봄풀이 돋아나듯 머지않아 독립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글이에요. 이 글은 안중근의사가 서거 이틀 전에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의미에서 쓴 마지막 휘호라고 합니다.
또 비석의 뒤쪽에는 '연지'라고 써있는데 '연못 물을 담은 벼루'라는 뜻입니다. 찬송가 중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라는 가사가 있는데, 아마도 이 곡의 의미와 같은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연못 자체를 벼루 삼아서 글을 쓰려고 했던 그의 호방한 기질과 큰마음을 느낄 수 있었죠.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지냈던 기간은 1909년 10월 22일부터 11월 1일까지 고작 11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가졌던 마음은 남달랐던 것 같았어요. 그는 자오린 공원을 산책하며 명상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할 계획을 꼼꼼히 점검하고 논의한 장소도 바로 자오린 공원이었죠.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죽은 뒤 자오린 공원에 뼈를 묻어두었다가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고 했지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 공원은 많은 사람이 찾는 시민들의 쉼터지만,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은 이곳에서 거사를 준비하고 공원 앞의 이발관에서 단정하게 이발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에게 이곳은 마음을 가다듬는 장소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했던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죽기 전까지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 죽지만 자신의 죽음이 나라의 독립을 앞당기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테고요.  

한가로이 사람들이 거니는 공원의 연못에는 유유히 물고기가 헤엄치고, 무성한 푸른 잎의 나뭇가지에는 새들이 쉬어가며 노래하지만 그곳에, 그 넓은 공원에 서있는 비석 하나가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끝까지 희망을 붙잡을 수 있을까...
 

 

관련기사

저작권자 © 힐링앤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