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크라스키노 _ 안중근의사 단지동맹비

김예채 컬럼니스트

‘이제 당신이 행복할 차례입니다’ 저자
‘마음에도 길이 있어요’ 저자
어른들을 위한 월간 인문학학습지 ‘한걸음’ 집필진

▲ '단지동맹비' 전체 풍경
▲ '단지동맹비' 전체 풍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서 가야할 곳은 크라스키노였습니다. 바로 안중근의사 단지 동맹비가 있는 곳이죠. 비교적 먼 곳에 있고, 그 지역에는 단지동맹비를 제외하고는 다른 유적지가 없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지만 저는 그래서 더 가보고 싶었습니다.
가이드는 비포장도로가 포함되어 있어서 가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고 했죠.  
4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다고 느꼈을 즈음, 버스는 잠시 멈췄습니다. 고려인의 첫 정착지인 지신허 마을 입구에 다다랐기 때문이죠. 지신허 마을은 1863년 한인 열 세가구가 최초로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입니다. 5년 뒤인 1868년에는 165가구가 되었고, 6년 뒤인 1869년에는 766가구가 거주하는 대표적인 한인마을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신허 마을은 남북으로 12km, 동서로 2km 규모로 강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려인 강제이주 이후 이 마을은 사라지게 되었죠. 안에 들어가면 2004년에 가수 서태지씨가 세웠다는 최초의 지신허 정착비석이 있는데 지금은 군사지역이 되어서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 정착비석은 보지 못하고 철조망 너머의 보이는 곳이 지신허 마을임을 확인하고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래도 고려인의 최초 정착마을을 기억하기 위해 누군가는 비석을 세우고, 또 여전히 멀리에서라도 그 지역을 조망 할 수 있도록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지신허 마을에서 하산 쪽으로 10분 정도 더 달리다 보면 아주 넓은 들판이 나오는데요. 들판을 한참 달리면 오른 쪽에 홀로 서 있는 단지동맹비가 보입니다. 바로 안중근의사가 1909년 2월, 동의단지회를 결성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에요. 크라스키노는 초기 이주 한인들의 정착지이기도 했고, 앞서 다룬 최재형 선생님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이기도 하며, 안중근 의사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 치뤘던 작전지역이었어요. 우리가 달려온 라즈돌리노예에서 크라스키노에 이르는 도로는 초기 이주해왔던 한인들이 직접 공사하여 만든 도로일 만큼 초기 한인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죠.

▲ 단지동맹비
▲ 단지동맹비

단지동맹비가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비석이 최초로 세워진 것은 2001년 10월 19일인데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핏방울 형상의 기념비를 크라스키노 추카노보 마을 입구 시냇가 공터에 세웠다고 해요. 그런데 그 옆에 강변이 있어 물에 잠기는 일이 많았고, 기념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지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사례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고 합니다.
결국 2007년,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의 조율 아래 현지 진출기업인 남양알로에와 협의가 이루어지고 관리가 용이한 남양알로에 제1농장 입구로 비석을 이전하여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러시아 국경수비대로 편입되면서 통제구역으로 변경되어 한국인들의 출입이 어렵게 되었어요. 2011년 8월, 다시 기념비는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됩니다.
크라스키노에서 두만강 국경도시 하산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 유니베라 현지 지사 입구인데 몇 개의 조형물을 추가하여 아예 공원으로 조성하게 되죠. 비석이 옮겨오는 과정을 듣다보니 다른 나라에서 이 비석하나가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나라 잃은 설움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마치 우리나라가 독립을 외치고 싸웠던 것만큼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단지동맹비는 가로 1m, 세로 3~4m 되어 보이는 높은 검정 비석과 높이와 폭이 1m 정도인 작은 검정 비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비석 주변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얀 눈이 수북히 쌓여있었죠. 1909년 3월경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 의사와 11인의 동지는 태극기를 펼쳐 놓고 왼손 무명지를 잘라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했습니다.
안중근,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는 피로 맹세하며 조국 독립과 일제 타도의 뜻을 다진 것이죠. 

이후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그 당시에 러시아 관할이었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어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죠. 이후 뤼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재판을 받고 1910년 2월 14일, 우리에게는 발렌타인데이로 더 익숙한 날에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리고 그 해 3월 26일 순국했습니다.

▲ 단지동맹비와 15개의 돌
▲ 단지동맹비와 15개의 돌

단지동맹비 두 개의 비석 앞에는 15개의 돌이 놓여 있어요. 왜 15개일까 알아봤더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잡힌 이후 법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 15가지를 이야기 했었는데 그 이유들을 각임시 돌에 의미를 담아 남겨놓았더라고요. 

함께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맹세한 동지의 죽음을 보았던 나머지 11명의 동지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백규삼 의사는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항일 투쟁 중 전사하셨어요. 황병길 선생님은 훈춘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훈춘에서 병들어 돌아가셨고요. 조응순 선생님은 한국독립단을 결성하고 한국의용군 결사대장으로 대원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선생님의 형 집행내역이 기록된 ‘신분장 지문원지’에는 네 번째 손가락의 지문이 없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단지동맹을 하며 끊었기 때문이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1910년 조선은 완전하게 일본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동지의 죽음으로도 지키지 못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함께 맹세했던 11명의 동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따로 또 같이 힘껏 나라를 지키다 순국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동지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바로 조국이 동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나의 나라에서 평안한 하루를 마감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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