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양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수, 교황청 국제신학위원)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로마(Roma) 시대 노예 검투사(gladiator)들의 반란과 죽음을 다룬,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1928-1999) 감독의 1960년 작 영화 '스파르타쿠스'는 실제 인물 스파르타쿠스(Spartacus, 기원전 109-71)와 그의 역사적 행적에 기초해 제작되었다.

로마제국 당시에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노예 검투사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그야말로 하루살이와도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노예 검투사들은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과도 같은 아레나(arena)에서, 피에 굶주려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 서서 목숨을 건 결투를 해야만 했다. 

때로는 맹수를 상대로, 때로는 다른 검투사를 상대로 싸워야만 했다. 오늘은 내가 운이 좋아 상대방을 죽이고 승자가 되지만, 내일도 모레도 끊임없이 계속 싸워야만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오늘 내 칼과 창에 맞아 비참하게 죽어가는 상대 검투사처럼, 나 역시 신(神)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상대방의 칼과 창에 참혹히 죽어가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 속에서, 그들은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갔던 것이다.

이런 비참한 운명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노예 검투사들의 지도자가 바로 스파르타쿠스였다. 그들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며 많은 다른 노예들을 규합하여 큰 세력으로 성장해나갔고, 로마제국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최후의 전투에서 패하여 그들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이처럼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이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기원전 100-44) 및 폼페이우스(Pompeius, 기원전 106-48)와 함께 로마제국 제1차 삼두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한 크라수스(Crassus, 기원전 115-53) 장군이었다.

영화 속에서, 크라수스 장군은 노예 반란을 진압한 후, 그 앞에 무릎 꿇은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젊은 동료 안토니우스(Antonius)에게 서로 칼을 들고 죽기까지 싸우라고, 그래서 승리하여 살아남은 자를 십자가형(crucifixion)에 처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 칼을 들고 정말로 싸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시에 말싸움도 시작된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게끔 하는지 아느냐고, 그러니 고집부리지 말고 자신의 칼을 받으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서로 격렬한 칼싸움을 벌인다. 

마침내 스파르타쿠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그를 칼로 찔러 숨지게 한다. 그리고 동료의 주검을 끌어안고 흐느끼던 스파르타쿠스 자신은 마침내 십자가형에 처해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사랑하는 동료를 차라리 내가 칼로 찔러 짧은 고통 속에 죽게 하고, 대신에 자신이 십자가형을 받겠다는 선택을 할 정도인가? 

물론 이것은 영화 속의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스파르타쿠스가 로마 진압군과의 마지막 전투 속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살아남아 체포된 그의 추종자들 6천여 명은 모두 실제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탈리아 반도 동남단의 항구도시 브린디시(Brindisi)에서 시작해 나폴리(Napoli) 근처의 고대 도시 카푸아(Capua)를 거쳐 로마로 통하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의 길가에 6천기가 넘는 십자가들이 세워지게 되었고, 거기에는 십자가형을 당한 노예들의 주검들이 매달리게 되었다. 

그들을 진압한 크라수스 장군은 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주검들을 몇 년이고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을 거역한 반란자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하게 끝나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사실, 극도의 고통을 주면서도 가능하면 서서히 죽게끔 만들어, 죽음에 이르는 공포의 과정을 극대화시켜 느끼게 하는 무서운 형벌이 바로 십자가형이었다. 

커다란 대못이 손발의 살과 뼈를 뚫고 들어와 십자나무에 박히게 되고 그때부터 출혈과 감염이 시작되어 온몸의 힘이 서서히 빠지면서 고열과 목마름 속에 매우 고통스럽게 죽어가게끔 하는 무서운 형벌이었던 것이다. 

사람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뒤 불과 몇 시간 만에 숨을 거두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려 죽음에 도달하기도 했다. 보통의 성인 남자는 24시간 이내에 사망하는데, 개인의 체력이나 주변 환경에 따라 2-3일까지 버틴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에서 반란이나 항명과도 같은 국가반역죄를 저지른 대역죄인들, 혹은 매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노예들에게만 주어지던 형벌이었다. 십자가형은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Magnus, 재위 306-337)가 이를 폐지하기 전까지 계속 행해졌던 악명 높은 사형제도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티나에서도 시행되었고, 나자렛 예수 역시 이러한 십자가 형벌로 처형되었다. 

그 고발된 ‘죽을 죄목’의 내용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함으로써 신을 모독하였다는 것, 그리고 ‘유다인의 임금’이라고 자처하며 정치적 선동을 함으로써 로마 황제에게 반역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는 나자렛 예수를 풀어 줄 방도를 찾다가 실패했는데, 유다인들이 다음과 같이 반역죄를 암시하며 사형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요한복음 19,12)

로마제국 시대의 십자가는 치욕과 고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십자가는 희망의 상징, 신앙의 상징이 되기에 이른다. 

고통스런 죽음의 도구였던 십자가가 이제는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며 또한 ‘십자가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힐링앤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