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 조선시대 두 천재 ‘세종·영실’의 관계 팩션 사극으로 완성
군신의 관계 넘은 그들만의 긴밀한 우정, “이것이 바로 브로맨스다”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행복(2007), 덕혜옹주(2016) 등으로 대표되는 멜로 장인 허진호 감독이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로 회자 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들고 관객을 찾았다. 영화의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순간 왜 허 감독을 국내 영화계에서 멜로의 장인으로 불리는지 다시 한 번 재확인 할 수 있을 정도로 캐릭터의 감정선을 스크린에 옮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영화 천문은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허 감독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20여년간의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 안여(安與: 임금이 타는 가마) 사건의 발생 이유, 그 이후 장영실의 삶을 영화적인 상상력을 동원, 팩션 사극으로 완성했다.

허 감독은 조선시대 천재 과학자로 이름을 날린 장영실이 안여사건으로 인해 곤장을 맞은 이후 역사 속에서 완벽하게 종적을 감춰버린 데 의문을 품고 영화를 제작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한 바 있다.

국가에 힘이 되는 인재라면 작은 흠이 있더라도 중용해왔던 세종이 한 번의 실수로 뛰어난 인재를 외면한 것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감독 스스로가 찾아본 것.

역사서 한 켠에 단 몇 줄만 기록돼 있는 사실 관계를 이렇게 그럴 듯하게 풀어내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상상을 거듭 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감정선이 살아 숨쉰다.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으나 천출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무시당하는 영실. 그러던 어느 날 영실 앞에 운명같이 세종이 나타난다. 영실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세종은 그를 등용하고 백성의 생활을 이롭게 하는 각종 기구와 장치를 만든 공을 들어 천민의 고리를 끊어준다. 기강을 운운하며 영실을 시기하고 경계하는 조정 대신들 앞에서도 그의 재능을 강조하며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종이 이처럼 영실을 아낀 데는 이유가 있다. 무엇을 원하고 상상하든 세종 앞에 결과물을 내놓는 천재성을 꿰뚫어 봤기 때문이다. 영리한 과학자이자 순수한 예술가로서 세종의 의중을 귀신같이 파악했던 영실과 세종이 군신의 관계를 넘어 벗이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책벌레인 세종이 밤늦게 책을 찾으러 갔을 때 잠에 빠진 영실을 보고 혹시 깰까 봐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장면. 쏟아질 것 같은

별이 촘촘히 박힌 하늘을 같이 누워서 바라보자고 하는 장면. 천출이라 별이 없다는 영실에게 본인 별 옆 별이 너의 별이라고 일러주는 장면 등은 이 둘이 서로 의지하며 진정으로 마음을 나눴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영실을 곁에 두기 위해 세종은 주변과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지만 강산이 두 번 바뀔 때까지도 변함없이 그의 손을 꼭 잡아줬다. 그만큼 각별했다는 의미일 터.
영실에게도 자신의 진가와 희노애락을 알아봐 준 세종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인데 영실은 세종의 비호 아래 오랜 기간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열정과 재능을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역사에 기록돼 있는 세종과 영실의 발명품을 보며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영화에서 물시계 자격루의 작동 원리, 천문기구 혼천의의 위용과 사용법 등을 상당히 공을 들여 묘사한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지루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관객들이 흥미를 잃지 않고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세종과 영실의 관계가 투영된 결과물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아니었을까.

영화 천문은 두 남자의 브로맨스 뿐만 아니라 세종의 자주성도 적극 부각시킨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은 굳건한 신분체계와 명나라를 향한 뼛속 깊은 사대주의 속에서 조선의 것을 새롭게 개척하고자 했던 세종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명나라 없이는 절대 홀로 설 수 없으니 마땅히 예와 도를 지켜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신하들 사이에 둘러 쌓여 있지만 누구나 공평하게 읽고 쓰고 배울 수 있으며 우리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제시하고 불도저 같이 밀어 붙이는 세종을 보며 새삼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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